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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6. 2023

사랑, 너와 나의 코뮨

친구가 문득 내게 물었다. 롱디 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연락 빈도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연인들이 흔히 싸우는 이유들로 옮겨 갔고, 자연스레 '선물'과 '밥값'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기념일이나 더치페이와 같은 문제는 요새 연애 이야기에서 아주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혹자는 연애가 경제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지만, 나는 그 한탄에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주고받는 '경제적' 행위는 그 자체로 관계를 생성해낸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필요한 물음은 오히려 이것이다.


'어떤' 경제적 행위가 '어떤' 관계를 만드는가?


경제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부채, 첫 5000년의 역사>에서 '부채(debt)'에 대한 논의를 통해 경제적 관계는 이미 도덕적 관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는 세계 곳곳의 문화기술지(ethnography)를 활용해서 경제적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느 인간 사회에서나 발견되는 도덕적 원칙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건 다름 아닌 '코뮤니즘(communism)'과 계급 조직, 그리고 교환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코뮤니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건 여기서 코뮤니즘과 교환이다. 이때 하나를 먼저 짚자. 그레이버가 이야기하는 코뮤니즘은 정치 체계가 아닌 '도덕적 원칙'이다. 그는 코뮤니즘을 아주 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 인간 관계


그는 코뮤니즘이 유토피아나 '생산 수단의 소유'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 어디에나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관계의 원칙 혹은 양상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살면서 코뮤니스트처럼 행동할 때가 자주 있지만, 시종일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며, 사회가 철저히 한 가지 원칙에 의해서만 조직된다는 의미에서의 코뮤니즘 사회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며 북한이나 중국, 소련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레이버는 아주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코뮤니즘에 기초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공동 프로젝트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할 때, 고장난 수도관을 고치던 누군가가 동료에게 "거기 있는 렌치 좀 주실래요?"라고 부탁한다면, 동료가 그에게 "그렇게 하면 대가로 뭘 줄 건데요?"라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정확히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관계에 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런 장면들을 통해 그레이버는 코뮤니즘이 인간의 모든 사교성의 근본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담뱃불이나 담배를 빌려주거나 엘리베이터를 세워주는 작은 호의도 따지고 보면 다 '능력에 따라 주고 필요에 따라 받는' 것이다. 혹은 어린이가 철로에 떨어져 있을 때와 같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도울 것이다. 그레이버는 이것을 '기준선 코뮤니즘(baseline communsim)'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생각할 때, 코뮤니즘은 공동체의 한 형식이라기보다, 모든 공동체가 조직되는 기본 바탕에 가깝다. 폴 브랜드(Paul Brand)와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강연에서 부러진 다리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자신들의 책에 썼다. 문명의 시작은 다름 아닌 부러졌다가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인데, 그 이유는 생존이 어려워진 이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관계가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돌봄 또한 어떻게 보면 그레이버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코뮤니즘적 관계일 것이다. 


코뮤니즘과 교환 사이


그렇다면 교환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등가'에 관한 문제다. 교환은 두 당사자가 서로 받은 만큼 주는 과정이다. 물론 매번 정확히 똑같은 가치를 지닌 것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결국 교환은 등가를 향해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환은 우리에게 부채를 청산할 기회를 준다. 이를 통해 둘의 관계가 대등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도록 해준다. 시장에서 만난 이들이 서로를 상대할 때면, 사람들은 단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꾸밀 뿐이다.


그레이버는 다양한 부족의 사례를 통해 역사적으로 교환은 적대 관계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으며, 한 공동체 안에서는 이루어진 바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교환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신뢰하지 않을 때, 관계의 빠른 청산을 생각하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잘 모르는 이방인이나 적대 관계에 있는 부족이 만났을 때, 이들은 교환 관계를 수립한다. 만약 여기서 눈속임이나 사기와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곧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사실 교환이란 언제나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에게 교환이 가장 익숙한 인간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은 다소 슬픈 일이다. 나는 연애를 할 때 선물을 안 좋아하는 편이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마르셀 모스가 이야기했듯 선물에는 세 가지 의무가 따른다. 주기, 받기, 그리고 답례하기. 물론 답례가 언제나 즉각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연애의 각본에는 특정한 기념일들이 정해져 있고, 그때는 선물을 주거나 받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선물 때문에 상대가 답례할 부담을 느끼는 게 싫었고, 상대의 선물 때문에 내가 답례할 부담을 느끼기도 싫었다. 나는 선물이 훨씬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을 읽은 뒤, 내가 싫어한 것은 선물의 세 번째 의무인 '답례하기'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답례가 되는 방식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정해진 날짜에, 상대에게 받은 것과 등가에 가까운 것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교환'이 아니라, 그저 언제든 내가 무언가를 주고 싶고 줄 수 있을 때,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상대가 그걸 직접 마련할 수 없을 때, 나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능력에 따라 주고 필요에 따라 받는, 코뮤니즘적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린 영원할 리 없으니까


사람들은 자기 어머니와 친한 친구들을 대할 때엔 마치 그들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생각한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짚어야 한다. 코뮤니즘과 교환에는 서로 다른 시간성이 있다. 코뮤니즘적 관계는 청산되거나 마무리될 수 없는 관계이고, 교환 관계는 즉각, 적어도 얼마 뒤에 청산될 관계다. 즉, 코뮤니즘은 영원한 관계를 상정하고, 교환은 일시적 관계를 상정한다.


연애에서 '가성비'를 따지고, '더치 페이'를 이야기하고, '등가의 선물'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게 아닐지 모른다. 그건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도 아니고, 섭섭한 연인의 귀여운 토라짐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이제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 테다. 지금 시대에 연애는 단지 잠시 동안의 심심풀이이자 교환 관계로 전락한 것이다. 언제나 '환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연인들의 시대, 서로의 마음을 돈이나 시간으로 환산되는 자원의 '소비'로 확인받고 싶은 연인들의 시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수요를 만들어낸다. 없던 욕망마저 만들어내어 물건을 갖고 싶도록 유도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필요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능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로하고 제 몫을 받지 못한다. 수요는 늘리면서, 수요를 감당할 능력은 주지 않는 상황에 '능력에 따라 주고, 필요에 따라 받는' 관계가 가능할 리 없다.


나아가, 특히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성애 연애의 경우 (특히 여성에게)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 여성에 대한, 남성에 의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에서, 심지어 그것이 제대로 처벌조차 되지 않는 사회에서 (특히 여성이) 영원한 관계를 꿈꾸기는 불가능하다. 포기할 수 없는 호기심과 설렘과 욕망, 그리고 위험으로 인한 불안과 불신이 한데 섞인 늪이 요즘 연인들이 디디고 선 바닥일 테다.


그런 연애의 모습들은 "마음은 열되 안보는 철저히"라는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연인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연락은 나에게 쓰는 시간의 척도고, 선물은 나에게 쓰는 돈의 척도다. 마음은 소비된다. 교환 관계는 언제든 관계를 청산할 수 있도록 하는 안보 전략이다. 이방인, 혹은 적대 관계에 적용되는 도덕적 원칙은 척박한 세상 속에서 연인 관계로 스며든다.

(참고로 "마음은 열되 안보는 철저히"는 청와대 근처에서 북한 무장공비를 저지한 경찰의 동상 옆에 적혀 있는 문구다.)


너와 나의 코뮨


그래서 나는 그레이버를 따라 사랑을 다시 정의해 보고 싶다. 그것은 능력에 따라 주고, 필요에 따라 받으며, 영원을 약속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좀 더 간결하게 표현하면, 그건 너와 나의 코뮨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청산되지 않는 부채를 안기고, 영영 그것을 청산하지 않는다. 부채는 반드시 청산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유지한다.


정말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알게 되어 재수까지 함께하고, 대학에 같은 학과로도 같이 다니게 된 친구. 나는 여전히 가끔 우리가 왜 멀어졌을지 생각한다. 이유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린 참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종종 내가 그에게 티셔츠 값을 갚은 일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그에게 콜드플레이 공연 티켓을 잡아 주었고, 현장에서 티셔츠를 대신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티셔츠를 받은 뒤, 나는 의류 분야의 물가상승률을 계산해서 그에게 돈을 보냈다. 그것은 나에게 경제학과 전공생으로서의 일종의 유머였지만, 같은 경제학과인 그에게조차 그것은 유머로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건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읽혔던 게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청산될 수 없는 부채를 떠안기고 그걸 영영 갚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것은 온 세계에 존재했고, 오히려 다른 모든 관계의 기초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금 부재한 것은 '괜찮은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 그 자체일 것이다. 관계의 기본은 교환이 아닌 부채다. 상환될 수 없는 부채. 상환될 수도 없기에,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는 일 자체가 불쾌한 관계.


그러니 우리 이제 고민하자. 어떻게 하면 상환될 수 없는 부채를 떠안고 영원을 약속하는 너와 나의 코뮨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그것은 만날 때마다 온갖 것을 계산하는 연인 관계에도, 투자한 만큼 성과를 원하는 부모자식 관계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받은 만큼 돌려줄 수도 없고,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말을 수시로 꺼내게 되는 덕질과 같은 실천들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그레이버, "경제적 관계들의 도덕적 근거에 관한 짧은 논문",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21

Philip Yancey & Paul Brand,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A Surgeon Looks at the Human and Spiritual Body>, Zonderva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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