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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May 17. 2020

감정에 휘말려 몸을 놓는 순간

낭독극 연습 두 번째 참석 후기, 몸과 감정에 관하여

몇 달 전, 나는 <낭독극: 아파도미안하지않습니다>라는 연극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읽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2019)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기에, 나는 나와 어머니가 환우로 연결되는 경험을 에세이로 적어 낭독극 모집에 제출했다. 그리고 낭독극에 함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내가 이 낭독극에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것이 '연극'이 아니라 '낭독극'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이유가 큰데, 정말 나가서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주는 내가 아파서 결석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연습 2주차에 처음 알게 되었다. 연습을 이끌어가시는 선생님이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연극임을 분명히 해 주신 덕분에, 이 기회에 몸을 다루는 법을 배워 보자는 마음으로 연습에 임했다. 


2주차에는 아직 어색함이 많아서 연습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다. 성별이나 나이가 중요한 기준이 아닌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린', '유일한 남성'으로 어느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적응이 필요하다. 원래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라서 그런 상황에 유독 더 적응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내가 첫 주 수업을 빠지고, 3주차에는 감기기운과 서울시 집단감염으로 빠졌다. 아쉽기도 하고, 내가 사람들과 충분히 편해지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4주차에서 그런 걱정은 모두 흘러나와 사라졌다. 종일 우리는 춤을 췄다. 정교한 형식을 갖춘 '춤'이 아니라, 틀어져 있는 음악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그저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초등학교 학예회 이후로 연극이나 춤 같은 건 처음이었고, 평소에도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일상의 거의 전부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지만, 나도 처음에는 그냥 머뭇거리며 걷는 척만 했다. 그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너무 어색했는데, 나의 몸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어 그런 것이 컸다. 


그런데 한 곡, 두 곡, 세 곡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사람들도 점점 다양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쪼그리기도 했다. 나는 주로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아서 몸을 움직였는데, 그러다가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진 순간이 있었다. 함께 연습하던 한 분이 연습공간을 가로질러 빠르게 걷다가 점프를 하셨다. 그 모습을 본 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나 안도감을 느꼈고, 그 사람의 점프가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몸의 아픈 부분을 인식했다. 선생님은 지금 가장 불편하거나 거슬리는 몸의 부분을 짚어 보라고 하셨다. 어깨, 허리, 목 뒤, ... 나는 목 뒤와 어깨 사이였는데, 목 뒤와 조금 더 가까웠다. 선생님은 바로 그 아픈 부분이 몸을 이끌게 하라고, 그 부분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 몸이 가게 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습 초반에 선생님은 춤을 추지 않고 몸의 뻐근한 부분을 풀어줘도 된다고 하셨는데, 몸을 풀어주는 것과 아픈 부분이 내 몸을 이끌게 하는 것은 내 몸의 힘들 안에서 연결되고 있었다. 나의 몸은 특정한 방식으로 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몸의 아픈 부분을 풀어주는 일은 몸의 부분들 사이의 긴장을 안 아픈 부분의 입장에서 해소하는 일이었고, 아픈 부분에 온 몸을 맡기는 일은 그 긴장을 아픈 부분의 입장에서 해소하는 일이었다. 나는 왼쪽 어깨와 목 뒤 사이의 어느 근육에 이끌려 가듯, 때로 그 근육을 풀어주듯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것은 모두가 각자의 몸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타인의 시선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은 음악을 끄고, 이번에는 타인의 소리에 맞추어 움직이라고 하셨다. 한 사람이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를 있는 대로 내면, 나머지는 그 소리에 맞추어 움직인다. 선생님이 가장 먼저 의자에 앉았고, 나는 눈을 감고 청각만을 열려고 노력했다. 눈을 감는 일은 내가 오로지 청각과 촉각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선생님이 내는 소리는 아픈 소리 같기도 했고,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주 음색이 바뀌고 음의 높이가 달라져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곧, 나는 내가 우는 소리라고 느낀 그 소리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팔을 굽힌 채 바닥에 대고, 땅을 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친구의 부고를 전하던 몇 년 전 나의 몸이 갑자기 내 안에서 튀어나왔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도록 애써 참았다. 


그 뒤로도 두 명이 이어 소리를 냈다. 그때쯤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렘이 아니라,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거나 잠이 부족하고 일은 많은 상태에서 느껴지는 떨림이었다. 답답하고, 무언가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떨림이었다. 선생님이 소리 낼 다음 사람이 있느냐 물으실 때,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내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점이 연습의 핵심이었지만, 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나의 몸이 여전히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번에 방식을 바꾸었다. 모두 각자 편한 위치에 편한 자세로, 모두가 동시에 각자 나오는 대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소리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자유로워지겠다'라는 생각만큼, '신경 쓰지 않겠다'라는 다짐만큼 부자유한 것도 없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무나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첫 소리가 터져 나온 뒤, 나는 내 몸을 온전히 내 감정에 내어 주었다. 


답답한 가슴을 풀려고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속이 끓는 소리를 냈다. 매순간 끊기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점점 화와 체념 사이 어딘가에 있는 붙잡기 어려운 소리가 몸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소리에 감정을 실으려 노력했는데, 점점 감정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울고 있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소리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한복판에서 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만 '함께 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울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모두가 나와 함께 울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리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함께 우는 일은 좋은 기억이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사람과 함께 우는 상황을 떠올릴 때,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고, 헤어나올 수 없는 이미지는 친구의 입관이다. 


친구들과 함께 광주 여행을 갔었다. 광주의 5월을 기리는 의미였다. 우리는 광주의 묘역에 가서 이름들을 하나씩 읽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전화가 왔다.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언제 연락이 와도 반가운 형. 그 형은 나에게 한 친구의 부고를 전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놈이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은 부고를 듣는 순간이 아닌 전하는 순간이었다. 광주의 묘역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마치 몇 년 전 어느 빈 건물에서 모두가 내 곁을 조용히 피하고 경비노동자분조차 가까이 오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통곡하던 그때처럼. 


나는 친구들을 남겨 둔 채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일일이 묘사하기 힘든 순간들 이후, 나는 그의 입관을 지켜보기로 했다. 10년지기 친구의 마지막이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러나 입관은 그 정도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얼굴이 있었다. 얼굴을 뺀 모든 몸에는 하얀 천이 감겨 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울고 있었다. 분노, 슬픔, 억울함, 답답함과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부정과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직면한 현실이 뒤섞인 비명이 모두의 목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게 함께 우는 일에 관한 나의 가장 가까운 기억이다. 


나에게 함께 우는 일은 죽음 앞의 마지막 절망이었으며, 나한테 무엇이든 베풀기만 하고 받은 건 하나도 없이 떠난 친구에 대한 이기적인 야속함이었으며, 힘 빠지게 순진한 얼굴에서 나오는 헛소리를 이제 들을 수 없다는 황망함이었다. 


49재가 끝나고, 나는 절과 숲과 강을 영상으로 담았다. 풀이 가득해서 어두운 낮, 흐르는 물 옆에 부러져 쓰러진 나무, 거미줄, 부서진 틈새, 그리고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친구를 보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기억도 극복하지 못했다. 어떤 기억도 내보내지 못했다. 그 모든 감정을 나는 여전히 직면할 수 없었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억눌러 외면했다. 거의 매일 그 친구가 떠올라도, 나는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다만 친구가 그리울 뿐이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거부하고 외면하던 내 안의 감정은 통제를 벗어나서 몸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속에서 나오는 아무 소리나 내라고 했을 때, 그 소리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이며 응어리를 쏟아내기 위한 가장 적절한 힘들을 배치할 때, 이 모든 기억들은 내가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들과 함께 다시 쏟아져 나왔다. 보고 싶다, 나쁜 새끼야, 왜 그렇게 갔어, 나는 어쩌라고, 잘못도 없잖아, 한 번이라도 연락하지, 미안해, 미안해, 밝은 너가 힘들 줄 몰랐어, 왜 그렇게 나한테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았어, 왜 그렇게 갔어, 왜, 미안해, 나쁜 놈아, 돌아와, 아직 안 늦었으니까 돌아와, 니쁜 새끼야, ... 목과 가슴 사이 어딘가가 둥글게 부풀어 터지는 듯한 몸에서 나오는 울음은 그 모든 말이었다. 친구의 뼛가루가 묻힌 곳에 한 번도 다시 찾아가지 않고 일상을 되찾겠다고 노력했으면서 일상도 제대로 되찾지 못한,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나의 절망과 후회였다. 


몇 년을 외면하며 살았던 이 모든 감정들이 갑자기 터져나와서 내 몸을 제멋대로 조작할 때, 내 몸이 감정에 휘말려 나의 통제 바깥으로 나갈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웠다. 억누른 감정을 직시하겠다고 결심할 때가 아니라, 억눌린 감정이 내 몸을 붙들고 흔들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웠다. 몸이 단지 감정을 싣는 도구가 될 때, 내가 나의 몸을 놓을 때, 감정이 내 몸을 장악하고 자신을 세상에 내던질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웠다. 사람들과 함께, 그러나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며 울 때, 비로소 함께 우는 일은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니게 되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외면들을 생각한다. 감정을 억누르며 자유로워지겠다던 나의 몸을 생각한다. 가장 비참했던 순간에 온 몸에 우글거리던 감각을 생각한다. 죽을 듯이 울고 나서, 어쩌면 내가 정말로 다시는 이렇게 비참하게 울지 않을 거라고 믿게 해 준 최초의 후련함을 생각한다.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생각한다. 이제야 용기를 내어 직시할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를, 더는 목구멍과 혀뿌리로 짓누르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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