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월간지 <복음과상황> 2021년 6월호(367호)에 “약해진 채로도 더불어 살 길”로 실린 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재판관이 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공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와 당신이 말하는 ‘공정’이 과연 같은 단어이긴 한 것인지 몇 년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공정은 ‘평등’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한 측면이 있다. ‘평등’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의 요구, 즉 다른 이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가장 짧게 압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와 소수자 운동의 다양화, 최근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평등’은 차별에 맞서는 중요한 단어로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하자는 말이 ‘평등’인데도, 평등은 ‘자유’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인권을 보장하면 다른 누군가의 인권은 침해된다는 식의 담론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전용공간이나 장애인 의무고용 같은 사례들을 둘러싼 논쟁을 떠올리면 간단하다. 이러한 조치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과정을 ‘역차별’로 명명한다. ‘표현의자유’라는 이름으로 ‘혐오표현 할 자유’를 주장하는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모두 ‘평등’에 대한 요구를 그 자체로 ‘차별’이나 ‘자유의 침해’로 프레이밍해서 ‘평등’을 부당한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정’은 ‘평등’의 대안으로 담론장에 소환되었다. 이 말이 마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청년’들을 차별하지 않는 언어인 것처럼. 하지만 정말 지금 외쳐지는 ‘공정’은 그토록 매끈하게 모든 문제를 봉합하는 해결책일까. 이 글에서 나는 ‘공정’이라는 거대한 단어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공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누락된 현실과 배제된 존재들을 드러내고,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공정’에 대한 논의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지 질병권과 장애 운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얼마 전, 어느 대학교에 특강을 다녀왔다. 내가 쓴 책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과 ‘질병권’(疾病權) 개념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서였다. ‘의료서비스의 현재와 미래’가 주제인 만큼, 문화적 측면을 많이 다루는 내 책보다는 질병권 개념에 조금 더 집중하여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 전에 학생들은 미리 읽을 자료가 있다면 알려달라고 했고, 나는 기사와 논문 몇 개를 알려주었다. 감사하게도 특강 시작 전에 대부분은 이 자료를 다 읽고 자신의 감상이나 질문을 적어서 보내주었는데,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개인이 자신의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능력주의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질병권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권리’ 혹은 ‘약해질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박’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냐는 고민이었다.
이 질문이 재밌었던 것은 그 학생이 질병권에 대한 예상 반박으로 떠올린 내용이 질병권의 핵심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질병권은 경쟁의 승부를 가리기 이전에 지금 경쟁이 이루어지는 사회구조 자체가 정당한지를 따져 묻고, 강해지기 이전에 강하다는 것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질병권은 다소 낯선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조한진희는 건강 중심 사회를 바꾸고,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직접 말하게 하고자 ‘질병권 운동’을 시작했다. 질병권은 2016년 그가 쓴 글1)에서 처음 등장했다. 기본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아플 권리’를 의미한다. 단어의 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 질병권은 건강권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질병권을 논하려면 건강권 개념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만, ‘건강권’의 의미는 아직 명료하지 않다.2) 그래서 나는 다양하게 제시되는 건강권의 표현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건강권에서의 ‘건강’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작년 가을쯤, 나는 한 다큐멘터리 촬영에 참여하면서 장내 미생물 검사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결과가 상당히 재밌었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픈 사람 중에 제일 건강하고, 건강한 사람 중에 제일 아프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게 수치상 입증되어버린 것이다. 복잡한 미생물 이름이나 수치들은 제쳐두고 간단히 설명하면, 수치상 크론병 환자가 평균 20 정도, 건강한 사람이 50 정도면 나는 30 언저리에 있었다. 이런 경향성이 거의 모든 기준에서 유지되었고, 염증성 장 질환 환자의 장에서 발견되는 미생물은 크론병 환자 평균보다 오히려 조금 더 많았다. 내가 몸으로 느끼던 게 수치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면 크론병 환자이기는 한데, 크론병 환자와 건강한 사람 사이에 애매하게 끼인 나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는 나만의 고민이 아니다. 아픈 사람 혹은 아픈 사람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하는 고민이다. 도대체 ‘건강’은 뭘까? 내가 1~2년마다 대장내시경을 하고, 몸 상태를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매일 약을 먹고, 식단을 조절하고, 3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진료를 보고, 그때마다 산정특례제도 덕에 의료비 중 90%를 국가에서 지원받으면서도, ‘건강권’이 나에게서 멀게 느껴진 것은 아마 나에게 ‘건강’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도 모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는 개운한 느낌이 기억나지 않는 나에게 ‘건강’은 먼 과거의 것, 혹은 (결코 오지 않을) 먼 미래의 것으로만 느껴졌다.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는 오직 치료로만 상상되는 장애인의 시간을 ‘치료 강제의 시간’이라고 개념화했다. 치료 강제의 시간 안에서 장애인에게 치료 바깥의 일상은 용납되지 않는다.3) 김은정은 그러한 시간이 장애인의 삶을 ‘비장애인이었던 과거’와 ‘치료되어 비장애인이 될 미래’로 환원하여 장애인의 현재를 지워버린다고 비판한다.4) 나는 여기서 ‘비장애’의 자리에 ‘건강’을 대입하고자 한다. 건강은 비장애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결국 미래에 되찾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강조하고자 이번 글에서는 건강권을 ‘건강할 권리’로 풀어 쓰기로 한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하게 여겨지지 못한 역사가 존재하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하는 온갖 문서가 생겼듯, 건강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당연히 건강한 것이 아니고, 건강의 기준 또한 사회마다 다르다. 따라서 건강권은 ‘건강’이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을 통해 성취되는 상태라고 전제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건강권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건강권은 지금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건강해질 권리와 지금 건강한 사람이 앞으로도 건강할 권리, 즉 건강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다.5)
여기서 ‘건강’을 ‘질병’으로 바꾸면 ‘질병권’은 ‘질병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가 되는데, 이것은 다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질병이 우리에게 이로워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은 질병권 운동을 하는 나에게도 낯선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질병권’은 무엇일까? 질병권이 처음 다루어진 맥락에서 질병은 부당한 노동조건이나 사회적 차별의 결과로 등장하고, 따라서 질병권의 요구는 노동조건 개선과 더불어 성차별과 페미사이드(femicide)를 포함하는 혐오범죄가 없는 사회 환경의 구성이다.6)
나는 여기서 ‘시간’에 주목한다. 사람의 몸은 질병에 대처할 때 적절한 시간을 주면 발열, 콧물, 설사, 기침 등을 통해 나쁜 균을 쫓아내 알아서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증상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약을 먹어서 바로 가라앉히려고 한다. 조한진희는 건강이 곧 능력인 사회에서 어떤 아픔이든 바로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조급한 환자들’을 보며 아플 시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7)
‘아플 시간’은 ‘불구의 시간’(crip time)과도 연결할 수 있다. 앨리슨 케이퍼는 “장애와 관련된 사건들이 항상 늦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장애인들이 어디에든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이야기하고자 ‘불구의 시간’을 언급하는데, 이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시간이 어떤 몸을 전제하고 있는지 물음으로써 시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8) 건강을 노동의 자격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하지 않으면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고 집이나 병원에만 있느라 사회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일터의 몸이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아플 시간’은 누구나 노동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는 도구이자 질병권의 토대가 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특히 (남성) 청년들이 제기하는 공정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을 완전히 간과한다. 이들은 자신들만 군대에 가는 것이 부당하다며 여성 징병을 주장한다.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 모두를 ‘군대에 갈 수 있는 몸’으로만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크론병 환우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환우회에 가끔 들어가는데, 군대와 노동에 관한 이야기는 단골 주제다. 크론병은 기본적으로 신체검사에서 5급에 해당하는데, 이는 6급과 함께 통상적으로 ‘군 면제’라고 부르는 등급이다. 나도 5급을 받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군대를 고민하는 남성 환우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4급을 받아서 공익이라도 다녀오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직장을 구할 때 군대 면제 사유를 묻기 때문에, 일하기 어려운 몸으로 판단하여 채용에서 병력(病歷)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들의 치료를 지원하여 군대에 갈 수 있게 하는 ‘슈퍼힘찬이 프로젝트’가 존재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치료가 가능한 질병을 겪는 사람에게나 유효하다.
‘청년’들은 군 가산점 제도의 부활을 요구한다. 이때도 기존 군 가산점제가 폐지될 때 여성계의 비판이 거셌다는 파편적인 사실 안에서 그 제도의 부당함을 함께 지적한 장애 남성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논의를 언론이 그대로 받아적는 과정에서 ‘청년’은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모습으로만 표상되며, 장애 남성과 장애 여성 혹은 아픈 남성과 아픈 여성의 몸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청년 남성들이 징병 대상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군대에서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은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자원이다. 자신들이 같은 능력 혹은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군대 때문에 여성들에게 밀린다는 논리를 펼친다. 지금의 징병제가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능력주의가 있다. 여성 징병제를 주장하며 그 근거로 펼치는 ‘공정’은 능력주의의 전제를 되묻지 않고 기존 사회는 모조리 그대로 둔 채로 ‘똑같이 부당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요구이다.
능력주의에 근거하여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지금의 ‘공정’ 논의는 근본적으로 장애인과 아픈 사람들을 논의의 장에서 배제하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자본주의 혹은 산업화에 맞지 않는 몸을 정의할 때 등장했기에, 장애인 운동은 노동이 어떤 몸을 전제하고 있는지 밝혀내고 비판해왔다. 장애인 운동에서 ‘능력주의’를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 아닌, ‘능력에 따른 공정한 차별’이자 장애인 배제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9)
중증장애인에게 맞는 일자리를 요구하는 장애인 운동에서 ‘노동’은 단지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노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질병권에서 이해하는 ‘노동’도 그렇다. 지금의 사회에서 아픈 사람은 일자리를 찾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질병권은 단지 ‘아픈 사람도 취업하자’가 아닌, 아픈 사람들 몸에 맞는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가자는 운동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위험사회에서는 안전이 아닌 위험이, 건강이 아닌 질병이 기본값이다. 차별과 노동조건뿐 아니라 먹고 마시는 모든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 당장 아프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영양제를 챙겨먹는 사람들의 존재는 언제든 우리가 약해지고 아플 수 있다는 불안이 우리 일상 전반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게 영양제를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한다고 할지라도, 건강은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기본 조건이다.
질병권은 건강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건강권과 질병권은 오히려 서로를 보완한다. 질병권은 “질병을 중심에 배치하고,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 시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10) 즉, 우리가 살아가는 몸과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치료될 수 없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는 현실에서, 점점 빨라지는 노동의 속도에 맞지 않는 몸들도 정당한 구성원으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욱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질병권이 ‘공정’ 담론에 던지는 질문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우리는 함께 약해지고, 약한 채로도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고 함께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함께 약해져도 소외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 때만 ‘공정’은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1) 조한진희, “아플 권리를 보장하라: 질병권을 말하다”, 〈일다〉(2016. 10. 12.) 이 내용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 니다》(동녘, 2019)의 324-332쪽에 재수록되어 있다.
2) 손정인·김창엽 (2016), “개념으로서의 건강권”, 〈비판사회정책〉(52), 7-44쪽.
3) Alison Kafer, 《Feminist, Queer, Crip》(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27.
4) Eunjung Kim, 《Curative Violence》(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
5) 안희제, “질병권,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권리”, 〈비마이너〉(2020. 11. 12.)
6)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331-332쪽.
7) 조한진희, 같은 책, 325-326쪽.
8) Alison Kafer, 《Feminist, Queer, Crip》(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26-27.
9) 김도현, “에이블리즘과 능력주의, 그리고 전장연 운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2021년 투쟁 기조 해설〉, 유튜브 채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10) 조한진희, “우리 시대 건강권을 넘어, 질병권(疾病權)을 제안하다 - 질병권을 통한 상상력”, 〈2020 한국문화인류 학회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 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