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지 못했네 / 검은 들판 위 / 버려진 화분들이 / 말라버리고 / 너를 바라보았네”
도시의 겨울이 시작될 즈음엔 언제나 나무들이 ‘관리’라는 명분으로 잘려나간다. 음악을 들으며 집에서 나가는 길에 무더기로 쌓인 잘린 가지들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나는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서 어두운 불빛 아래 말라버린 나뭇가지 무더기의 거친 단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여기에 대해 어떤 글을 쓰겠지, 아니, 써야겠지, 생각하면서.
내가 이 지면에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내게 말했다. 함께 살던 식물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써달라고. 사실 그건 내가 일부러 회피해 온 주제였다. 식물을 다른 시간과 속도로 살아가는 존재로, 그래서 ‘키우는’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반려의 존재로 이해하려고 할 때, 식물의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들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그 무게를 충분히 느끼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게 내가 피할 수 없는 딜레마였다. 식물의 삶과 죽음은 내가 글로 쓰는 만큼 내게 무거워지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함께 산 강아지를 4년 전에 떠나보낸 이후, 우리 가족은 한동안 TV나 길거리에서조차 강아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고, 나는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을 조여왔었네 / 숨은 날들이 / 나이 든 가지들을 / 잘라버리고 / 너를 바라보았네”
식물이 죽을 때마다 속상했다. 그 정도였다. 그건 동물의 죽음만큼 아프지 않았다. 거리에서 비둘기의 시체를 마주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줄기나 가지가 완전히 베어진 나무를 볼 때는 그만큼 놀라지 않았다. 동네 중고장터에 식물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등록되는 걸 보고 있으면, 동물과 식물의 이별을 다르게 느끼는 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직접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 보겠다고 몇 주 동안 열심히 가지를 치고, 잎을 따고, 껍질을 벗겨낸 향나무. 다른 식물들의 죽음은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합리화했지만, 이 향나무의 죽음은 전적으로 나의 욕심과 손길 때문이었다. 죽어 가는 동안, 죽고 나서도 나무의 피부와 나의 피부는 맞닿았다. 뿌리가 모두 마른 채로 지금까지 내 방에 남아있는 향나무를 보면 그 촉감들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도 집에는 새로운 나무들이 들어왔고, 몇은 또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다. 날이 추워지고 키우던 바질이 죽는 걸 보며, 나는 내년에 어떤 허브를 집에 들일지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짙은 갈색의 피부를 지닌, 내 새끼손가락과 비슷한 굵기의 줄기를 가진, 작고 푸른 잎을 가득 틔우는 나무는 들이고 싶지 않았다.
“우린 / 흔들리며 / 우린 / 흔들리며 / 마주하지 못했네 / 마주하지 못했네”
보수동쿨러의 ‘숨’이라는 노래는 내가 들여놓고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죽고 나서는 짐을 치우듯 ‘처리’했던 식물들을 떠오르게 했다. 어느 날부터 나는 식물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식물을 떠나보낸 경험이 쌓이면서, 돌보는 책임을 느끼는 것도, 식물의 죽음에 무뎌지는 것도 싫었던 걸까. 그렇게 식물을 돌보는 일은 점점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함께 살던 식물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러게. 나도, 그저 흔들리며,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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