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나갈 때면 나는 버스에서 꼭 오른쪽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면 건물도 짓지 않은 작은 숲을 볼 수 있다. 그곳의 높게 자란 나무 끝에는 종종 넓은 날개를 펴는, 부리가 긴 하얀 새가 늠름하게 서 있곤 한다.
‘계절감’에 대해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나무였다. 봄과 여름에는 자기를 휘감고 가장 높은 가지까지 올라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푸른 잎을 보여주었고,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담쟁이의 이파리를, 겨울에는 앙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나무는 내게 계절의 지표와도 같다.
그런데 집안의 식물들이 경험하는 계절은 종종 그 나무의 계절과 다르다. 집 바깥의 담쟁이덩굴들이 이미 사방으로 푸른 잎과 끈질긴 줄기를 뻗어내던 지난 3월과 달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담쟁이덩굴은 4~5월쯤까지도 새 가지를 뻗지 않다가 결국 5월과 6월 사이 언젠가 푸른빛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집 바깥의 담쟁이가 비를 맞고 모든 단풍을 떨어뜨린 시점에, 집의 담쟁이는 여전히 붉은 단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통 3~4월쯤 봄이, 11~12월쯤 겨울이 시작된다고 이해한다. 3월이나 12월처럼 사람이 약속한 숫자만큼이나, 푸른 잎, 꽃, 열매, 단풍, 낙엽,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계절에 대한 조금 더 ‘자연적인’ 상징이라고 할까.
이런 상징들은 집 안과 밖에서 다른 속도로, 다른 시간으로 나타난다. 수분을 제때 제대로 못 시켜줘서 열매가 안 맺히기도 하고, 정확한 이유를 모르지만 3월에도 꽃이 피지 않곤 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집에 있는 호랑가시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아서 그 진한 향기를 못 맡은 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뾰족하고 빳빳한 잎은 계속 새로 나고, 가지는 계속 뻗는다. 마삭나무들은 지금까지도 대여섯 개의 잎을 제외하고는 단풍도 들지 않았다. 호랑가시나무와 마삭나무는 우리 집에서 사실상 1년 내내 봄과 여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리, 플라스틱, 실리콘 등으로 막혀 바람과 햇빛을 직접 맞지 못하고, 깊고 넓은 땅에 스며든 빗물 대신 좁은 화분에서 사람이 주는 수돗물을 먹으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형태로 꾸준히 조절되는 냉난방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식물들이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각양각색의 혼란스러운 계절, 혹은 계절의 중첩은 사실 새롭지 않다. 집 안과 밖을 오가며 살아가는 나는 어떤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집에서도 추워서 스웨터와 털바지에 수면 양말까지 무장했지만, 창가에만 가면 푸른 잎이 새로 돋아나는 나무들과 새싹이 올라오는 정체 모를 씨앗과 잎이 다 떨어진 담쟁이와 단풍이 조금 달린 나무를 모두 만날 수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떤 계절을,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사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짧아진 봄과 가을, 예측할 수 없는 소나기는 사람이 지구를 안락한 ‘집’으로 만들며 찾아온 혼란스러운 계절을 보여준다. 영화 <돈 룩 업>은 고개만 올리면 알 수 있을 만큼 자명한 재난을 직시하자고 말한다. 지구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운석보다도 가까운 것은 우리 곁의 식물들이다. 식물을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며, 식물의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결코 ‘힐링’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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