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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11. 2023

겨울과 벽과 하늘과 줄기와 가지

겨울은 식물의 반려인간에게 슬픈 계절이다. 거리의 나무들은 앙상해지고, 집에서 함께 지내는 나무들도 절반쯤은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붉게 들었던 단풍이 비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은 봄비에 단숨에 흩날려 떨어지던 꽃잎들을 상기한다. 꽃이나 단풍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빗댈 때 사용되는 건 그래서일까.


하지만 겨울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다양한 색채가 아니라 형태로 드러나는 나목(裸木)의 아름다움. 단풍나무처럼 평소에 잎이 풍성해서 수형(樹形)이 잘 보이지 않는 나무의 섬세한 가지들은 겨울에 비로소 나타난다. 자주 가던 분재원의 사장님은 바로 그런 이유로 겨울에 나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특히 담쟁이덩굴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무를 휘감은 것보다도, 단색 평면의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의 가지들. 집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하얀 벽에 줄기를 뻗어 올리며 사방에 잔가지들을 친 담쟁이를 마주치곤 하는데,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면 마치 누군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진작가 이명호는 나무 뒤에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서 마치 나무를 하나의 그림처럼 만드는 작품 시리즈인 <나무> 연작을 만들기도 했다. 이 연작이 전시되었던 갤러리 현대는 이 연작에서 “나무 한 그루가 캔버스 안에 삽입된 이차원적 이미지로 평면화됨으로써, 예술의 아름다운 대상물이자 주목할 만한 존재로써 전환”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캔버스를 실제로 나무 뒤에 세우는 것은 힘들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러한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겨울의 담쟁이덩굴은 하얀 벽이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이미지처럼 ‘평면화’되어, 누구도 예측하거나 기획하지 않은 예술 작품으로 전환되곤 한다. 이는 사람이 직접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명백히 자연과 문명의 중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람이 만든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과 그것을 아름다운 그림 같다고 여기는 사람, 이 삼자의 관계가 바로 그 하나의 우연적인 화폭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벽이 아니더라도, 맑은 날에 하늘을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얼마 전, 나는 밤늦게 혼자 거리를 걷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에서 잠시 고개를 들었더니, 그곳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캔버스 삼아 셀 수 없는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은 가로수들이 있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나뭇가지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 가로등 덕분이었다. 담쟁이덩굴이 주거환경 조성을 위해 설치된 벽이라는 건축물과 연결된 것처럼, 가로수는 치안을 위해 설치된 가로등이라는 전기 설비와 연결되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TV에서 나는 종종 ‘숲세권’이라는 신조어를 들었다. 집이 숲과 가깝다는 뜻으로, 삭막한 도시의 환경에서도 숲을 접하며 ‘힐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세권만큼이나 긍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되는 요인인 듯했다. 이는 한편으로 도시와 자연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 일상 안에는 자연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연과 문명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겹쳐지면서 다양한 화폭을 만들어내곤 한다. 벽과 하늘과 줄기와 가지가 캔버스이고 화가가 되는 장면들에 우리에게 가능한 어떤 공존의 모습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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