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우리는 씨앗부터 직접 심어 키운 레몬나무가 무럭무럭 잘 자라길 바라며 화분 셋을 집 바깥 계단에 내놓았다. 그때 어느 나비가 레몬나무에 와서 알을 낳았고, 거기서 태어난 애벌레들은 레몬나무의 잎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애벌레들을 보며 괜히 뿌듯해하던 어느 날에, 애벌레들은 사라졌다. 잡아먹힌 건 아닐지 걱정되었지만, 다음 봄에 나비가 되어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져서 레몬나무들을 다시 같은 자리에 내놓았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온 건 나비가 아니라 사마귀였다. 작년 여름엔 비를 피하러 온 큰 사마귀 하나가 방충망에 사흘 정도를 매달려 있었는데, 이번에는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밖에 안 되어서 눈에 힘을 잔뜩 줘야 보이는 작은 아기 사마귀가 레몬나무에 찾아왔다.
사마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 작은 사마귀에게 ‘사막아귀’라는 애칭까지 붙여 주었는데, 실제로 보니 애칭이 나올 만했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고 가는데 힘을 딱 주고 레몬 잎이나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자세는 나름 늠름했다. 아버지가 사진을 찍는다고 플래시를 여러 차례 터뜨렸더니, 사마귀는 양팔에 힘을 주어 아버지 쪽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 얼마나 작고 소중한 위협인가. 아버지는 마치 잔뜩 화가 난 작은 강아지를 귀여워할 때처럼 그 자세를 따라하며 당랑권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 녀석은 때로 옆의 다른 레몬나무에 가서 있기도 했고, 화분 둘레를 따라 걷기도 했다. 잎의 아랫부분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도, 자신의 색과 비슷한 줄기에 붙어서 살랑거리는 더듬이로 바람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벌레면 다 싫어하던 어머니도, 사마귀만큼은 무서워하던 아버지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매일 레몬나무를 들여다봤다. 베란다에서 함께 살았던 거미, 레몬 잎을 야무지게 갉아먹던 애벌레 다음에는 사마귀가 일상의 작은 기쁨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사라졌다. 찾아올 때처럼 떠날 때도 언제인지 모르게, 기별 없이. 어떤 신호가 있었더라도 아직 그걸 감지할 만큼 우리가 예민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일상이 묘하게 허전해졌다. 사마귀가 사라진 지 일주일은 족히 되었을 텐데도, 나는 여전히 매일 레몬나무를 확인한다. 마음이 변하면 돌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그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지만, 문득 기형도의 시 ‘죽은 구름’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애벌레와 달리 잎을 갉아먹지는 않아서 사마귀가 나무에 남긴 흔적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제 그 나무를 보면 작년에 왔던 애벌레와 함께 사마귀가 떠오른다. 하지만 저 홀로 없어진 사마귀는 처음부터 화분의 것도, 우리 가족의 것도 아니었고, 함께 지낼 때도 우리 가족의 것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으며 주변 나무들과 신선한 공기를 주고받는 레몬나무도 온전히 우리 가족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테다. 그렇다면 사마귀가 화분을 통해 우리 가족에게 잠시 머무르다가 간 것일까, 아니면 사마귀를 통해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화분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집 바깥의 흙과 나무와 벌레들의 관계 안에 잠시나마 더 깊이 머무르게 된 걸까. 어느 쪽이건, 아무렴. 다음 손님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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