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에서는 단호박이 자라고 있다. 기른다는 말보다는 확실히 자란다는 표현이 맞겠다. 우리는 단호박을 기르려고 한 적이 없다. 단지 호박죽을 만들고 나서 나온 호박씨를 말리고 까서 먹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호박씨를 말리려고 채반에 올려둔 데에서, 고작 호박씨에서 떨어진 습기만 갖고 싹이 났다. 하얀 채반에 누런 호박씨들이 가득한데, 그 정중앙에서 이미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자란 호박 새싹을 보는 건 정말이지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번엔 아버지가 뿌리를 내린 호박씨들을 발견했다. 네다섯 개의 호박씨가 하얀 뿌리를 뻗고 싹을 틔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황당했다. 남들은 집에서 자꾸 식물이 죽어나가서 걱정이라는데, 우리 집에는 계획에 없던 식구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미 있는 애들이 잘 자라는 건 관리를 잘해서 그렇다 쳐도, 채반에서 싹이 나는 건 도대체……. 그래서 결국 지금 집에서는 단호박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도 아주 무럭무럭. 어지간히 빨리도 자란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식구는 단호박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여름에, 밖에 내놓은 화분에서 정체 모를 다육식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까지 집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이파리가 흙에 떨어지는 족족 거기서 새로 뿌리를 내린다. 호박씨나 이 다육식물이나, 비밀은 그 생명력에 있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그 다육식물의 이파리들을 몇 개 떼어 다른 큰 화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더니, 거기서만 열 개쯤 싹이 나기 시작했다. 잘 된 일인지, 망한 일인지 모르겠다.
집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식물의 강한 생명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갈라진 아스팔트의 틈에서 자라는 작은 풀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기에 흙과 양분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저기에 자리를 잡았을까. 아스팔트를 그렇게 얕게 깔지도 않았을 텐데.
흙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자라다 보면 식물은 자랄수록 위험해진다. 집에서 분재를 키울 때 꾸준히 가지와 뿌리를 쳐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식물이 자랄수록 자신의 생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스팔트 틈새에서 자라는 식물에는 ‘그런 데서도 자랄 수 있는 생명력’과 함께, 머지않아 스러질 것이라는 예견된 죽음이 겹쳐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바로 그 좁은 틈에 또 조금의 양분을 남기고, 또 다른 싹이 그곳에서 자라날 것이다. 아스팔트의 작은 틈새에서도 꽃이 피고, 갈라진 계단의 틈새들에서도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나듯이, 아무리 흙을 덮고 없애도 식물은 그 틈에서 집요하게 되살아난다. 식물의 삶의 방식이란 그렇게 틈새를 찾고 파고들어 자신의 자리를 느리게,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식물의 시간>에서 ‘식물인간’을 다른 속도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정의했었다. 이제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식물과 같은 삶이란, 무력하게 눕거나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틈새든 살 수 있는 틈새라면 모조리 파고들어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삼는 삶이라고. 식물들은 누군가에게 무력해 보이고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도시의 식물들은 사실 그 고요 혹은 적막 안에서 살아내고 틈새를 만드는 분투들이 존재한다고 보여주는 듯하다. 생명력이란 예기치 못한 틈을 찾는 일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282&page=2&total=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