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기억하는 방법

by 한동헌

소금 평원과 솔트레이크 시티를 후다닥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관심을 끄는 곳이 있어 조금 둘러가더라도 들렀다. 아이들은 차 안에서 자느라 온전히 나만을 위한 일정이었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42만 5천 명 이상의 전쟁 포로들이 미국 전역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중 유타 주로는 약 15,000명이 보내졌고,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에 다 수용할 수 없었던 일부가 남쪽 작은 마을인 살리나(Salina)에 1944년부터 수용되었다.캠프 살리나는 외딴 곳에 있었던 다른 수용소와 달리 마을 안에 있었고,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소속이었던 전쟁포로들은 마을의 농장일을 돕는 일을 했다고 한다. 수용소가 꽉 채워졌을 때 수용인원이 250명이었다니까 일손 딸리는 시골 작은 마을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일군 전쟁포로가 근면하고 친절했다는 증언이 실린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포로수용소에서의 경계근무는 선호되는 임무가 아니었고, 일선 근무에 부적합 판정을 받은 병사가 맡았다. 1940년 미 육군에 입대한 클라렌스 베르투치(Clarence V. Bertucci)는 그 이유로 캠프 살리나의 경비를 서야 했다. 독일군을 때려잡고 싶다던 클라렌스는 독일군과 싸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불만이었고 규율 위반으로 군법의 처벌을 받기도 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45년 5월에 끝났지만, 독일군 전쟁포로들은 7월7일 저녁에도 수용소에서 독일로 보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23살의 베르투치 일병은 시내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웨이트리스에게 그날 밤 캠프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이야기했다.
야간 경비 근무를 시작한 베르투치는 자정이 되자 포로들이 잠든 천막을 향해 경비탑에 설치되어 있던 30구경 M1917 브라우닝 기관총을 갈겨댔다. 250발의 총알이 다 발사되는데 15초가 걸렸고, 6명의 독일군 포로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3명은 병원 이송 후 사망했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대부분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베르투치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아무런 뉘우침도 보이지 않았고, 후에 뉴욕 브렌트우드의 한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땅에서 발생한 적군 포로 학살 중 최대 규모였고, 2016년 포로수용소 부지에 박물관이 세워졌다.

민간인 학살도 수없이 벌어졌던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9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학살을 기억하는 방식과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는다.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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