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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 Solo" 무인도에 가져갈 음반

크리스틴 부쉬 <바흐 무반주 소나타 & 파르티타>

by 안일구
Bach: Sei solo. Sonatas & Partitas for Violin | Phi, 2013
"이것은 천상의 음악입니다. 순수함, 직접성, 즉각성, 그리고 하늘 같은 가벼움에서 느껴집니다. 음들은 무에서 비롯되어 형태를 이루고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연주는 대지의 힘, 평온함, 확신 또한 담고 있습니다. 이 음반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는 무인도에서 가져갈 음반 중 하나입니다. 빛과 그림자의 마법에 경탄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다그마르 문크(Dagmar Munck, SWR)

2024년에 출간된 책 <하루 하나 클래식 100>에 실린 부록을 위해, 나의 음악 멘토 두 분께 '무인도에 가져갈' 5개의 음반을 꼽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4년 동안 나를 가르쳐주셨던 독일 교수님은 고민 없이 이 음반을 첫 번째로 꼽았다. 수많은 음반과 악보를 소장한 컬렉터이자 연주자, 음악 애호가인 분이 선택한 인생 음반은 과연 어떤 음악일까?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틴 부쉬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1720년 바흐 자필 악보의 제목 페이지

바흐는 이 작품집의 제목으로 “Sei Solo”라고 크게 적어 넣었다. 일반적으로 'Sei Solo'는 이탈리아어로 ‘6개의 독주곡’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작품집에는 3개의 소나타와 3개의 파르티타, 총 6곡이 포함되어 있다. 바흐는 제목을 이렇게 단순히 붙였을 가능성이 높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 번 흥미로운 상상을 해보자. 만약 바흐가 이 제목에 중의적 의미를 담고자 했다면, 해석의 폭은 훨씬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6개의’라는 뜻으로 쓰였다면, 이탈리아어 문법상 복수를 나타내는 'Sei Soli'가 맞다. 그런데 바흐는 단수형인 Solo를 사용했다. 또한, Sei는 숫자 ‘6’을 뜻하기도 하지만, ‘너는 ~이다’라는 뜻의 동사 형태로도 쓰인다. 그렇다면 “Sei Solo”는 ‘독주를 위한(For Solo)’ 또는 ‘너는 혼자다(You are alone)’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Sei Solo는 단순히 곡집의 제목을 넘어, 바흐의 의도와 철학이 담긴 상징적 표현일 수 있다. 이는 곡의 독특한 구조와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작곡이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독일의 헨레(Henle)나 쇼트(Schott)와 같은 주요 출판사들은 제목을 대부분 “Sonaten und Partiten für Violine solo”(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들)와 파르티타(들))라고 표기하고 있다. ‘6’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Sei의 다의적 해석을 피하고, 그저 작품의 본질을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동시에 위대함을 가르칩니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바이올린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1006)는 모든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는 첼리스트들에게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가지는 중요성과 견줄 수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기술적, 음악적, 그리고 정신적 깊이를 시험하고 성장시키는 레퍼토리이다. 특히 이 작품은 단선율 악기인 바이올린 한 대로 다성음악(polyphony)을 구현한 놀라운 예로, 바흐의 천재성과 음악적 상상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음표로 빼곡히 채워진 악보 안에는 인간의 감정과 경험의 보편성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후디 메뉴인이 말했듯 음악을 넘어서는 "삶 그 자체"이다.



현대 바이올린과 바로크 바이올린을 모두 다루는 연주자인 크리스틴 부쉬는 필리프 헤레베헤가 이끄는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의 악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남긴 빛나는 결과물, 바로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음반을 추천받아 1번 소나타와 1번 파르티타를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나도 이렇게 연주하고 싶다." 두 번째는 "이 음반은 아껴서 들어야겠다." 실제로 나는 시간이 날 때, 그리고 컨디션이 좋을 때 이 음반을 꺼내 천천히 하나씩 아껴 들었다. 음악 애호가로서 이렇게 특별한 음반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큰 기쁨이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가로서 평생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부쉬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40대 후반에 이르러 경이로운 수준으로 완성해 냈다.


온전히 혼자서 해내야 하는 작품이다. 크리스틴 부쉬의 연주는 어려운 길이지만 뚜벅뚜벅 속도를 유지하면서 걸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주 까다로운 테크닉이 곳곳에 도사리는 곡이지만,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졸졸 흐르는 물처럼, 살랑살랑 부는 바람처럼 자연스럽다. 결코 급하게 서두르거나 늘어지지도 않으며, 종이 위의 음표들은 바이올린의 힘을 빌어 하나하나 생명력을 얻는다. 표현을 진하고 분명하게 하면서도 과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유려한 프레이징과 순수한 소리의 조화는 모든 감각을 깨우는 듯하다. 부쉬는 복잡하게 얽힌 대위법을 쉽게 풀어서 들려준다. 이렇게 바흐의 음악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완벽하게 소화한 연주자의 결과물을 우리는 언제든지 꺼내 들을 수 있다.


Essentioal Track | 디스크 2, 5번 트랙 (Partita No. 2 in D Minor, BWV 1004: V. Ciaccona)

아직 샤콘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곡은 가장 널리 알려진 클래식 음악 중 하나로, 크리스틴 부쉬의 연주는 특별한 울림을 전한다. 그녀의 연주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해석이 조화를 이루며, 감정적인 과잉 없이도 샤콘느가 가진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분위기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 연주가 담백하고 자연스럽다. 이토록 복잡한 구조 속에서 어떻게 이런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듣다 보면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 고요히 기도하는 모습이 떠오를 만큼, 그녀의 연주는 내면의 깊은 울림과 고요를 선사한다.

https://youtu.be/i0n8lgdunlc?si=lJLfgPCQSHvBe75C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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