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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 피아노 동화

아르헤리치, 플레트네프 <신데렐라, 어미 거위>

by 안일구
Cinderella Suite, Ma Mere L'oye | Martha ArgerichㆍMikhail Pletnev | Deutsche Grammophon, 2004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호기심, 순수함, 상상력, 창의력은 동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린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신데렐라는 요정 대모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얻고, 호박을 변신시켜 만든 마차를 타고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물레 바늘에 찔려 깊은 잠에 빠지고, 성 전체가 잠든 채로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다. 수십 년이 흐른 뒤, 한 왕자가 성을 찾아와 잠든 공주를 발견하고 키스로 저주를 깬다. 어른들은 현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동화 속 비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반면, 상상력이 풍부한 시기의 아이들에게 마법이나 기적 같은 요소들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음악은 동화를 닮아있다. 음악 역시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상상력의 산물이다. 많은 작곡가들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동화의 세계를 동경해 왔다. 슈만, 브람스, 차이콥스키도 ‘동화’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들어간 음악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작품 세계 전체가 ‘동화’를 닮아있는 두 작곡가가 있다. 바로 라벨과 프로코피예프이다. 프로코피예프는 <피터와 늑대>, <신데렐라>, 그리고 이탈리아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작곡했다. 라벨 또한 <어미 거위>와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 등의 작품에서 동화의 세계를 음악으로 옮겨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작곡가의 특별히 주제를 밝히지 않은 곡에서조차도 동화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음악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마치 하나로 합쳐진 듯한 느낌을 준다. 1900년대 초에 주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라벨과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이 동화를 닮아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아르헤리치와 플레트네프가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와 라벨의 <어미 거위>를 연주한다. 두 음악가는 모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피아니스트로, 서로 다른 음악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음악가가 함께 연주할 때마다 뛰어난 호흡과 놀라운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흔히 작품명에 '네 손을 위한'이라는 말이 붙으면, 하나의 피아노 앞에 두 사람이 앉아 함께 연주한다는 뜻이다. <신데렐라>는 원래 발레 음악으로 작곡되었으나, 이후 피아노 듀오 버전으로 편곡되었고, <어미 거위>는 원래부터 '네 손을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다. 두 연주자는 주로 하나의 악보를 보며 어깨를 맞대고 호흡을 맞춰 연주한다. 라벨은 <어미 거위>를 친구의 자녀인 미미와 장 고데보스크 형제를 위해 작곡했다. 이들은 라벨의 곡을 실제로 연주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라벨은 이 곡을 아이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소박하게 작곡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는 관현악곡으로 들을 때 더욱 압도적인 느낌을 주지만, 동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박한 피아노 버전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작품 속 주요 장면들은 프로코피예프의 탁월한 작곡 능력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아르헤리치와 플레트네프는 서로의 장점만 살리는 상호 보완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아르헤리치의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접근 방식과 플레트네프의 지적이고 절제된 연주 스타일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된다. 1번 트랙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분위기, 4번 트랙 ‘봄’에서 드러나는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리듬감, 그리고 5번 트랙의 신데렐라 왈츠 장면은 특히 황홀하다. 마법이 풀리는 시간인 자정의 긴박함은 마지막 트랙에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파반, 난쟁이, 미녀와 야수의 대화, 파고다의 여왕 레드로네트, 그리고 요정의 정원까지. <어미 거위>에는 프랑스 전통 동화와 페로, 마담 다울누아 등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다섯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각 2분에서 4분 남짓의 짧은 곡이지만, 한 곡 한 곡이 품은 매력과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한다. 플레트네프와 아르헤리치는 전체적으로 무심한 듯 연주하지만, 여러 질감의 터치를 활용해 이야기를 섬세하게 이끌어간다. 덕분에 피아노 연주라는 사실을 잊고, 그저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다. 특히 '미녀와 야수의 대화'에서는 두 연주자가 음색의 다양성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강하게 건반을 내리치지 않으면서도 여러 겹의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음반 전체의 마지막 곡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요정의 정원'까지 듣고 나면, 내가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동화 속 세계를 조금은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Essential Track | 14번 트랙 (Ma mère l'oye, for Piano Duet: V. Le jardin féerique)

<요정의 정원>은 다른 곡과 달리 특정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전체 동화를 아우르며 요정 세계의 신비로움을 표현한다. 또한 이 곡은 동화의 '행복한 결말'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닥치는 어떠한 어려움과 갈등도 결국에는 마법처럼 해결된다는 믿음. 그래서 라벨은 가장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마지막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https://youtu.be/zdhkn7yuAwk?si=Um0Cl3UCPHTyx4nr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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