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스, 뒤메이, 왕 <브람스 트리오 1,2번>
놀라울 정도다. 음악은 단순히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넘어, 그 순간의 냄새, 분위기, 촉감, 그리고 감정까지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이를 '음악 회상 효과(Music-evoked recall)'라고 부른다. 음악은 뇌의 편도체와 해마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데, 이 두 영역은 각각 감정 처리와 기억 저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음악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깊이 연결한다. 브람스의 음악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저장소가 된다. 그의 음악에 이토록 많은 기억이 담길 수 있는 이유는 브람스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에 온전히 녹여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처음으로 독일의 바이마르라는 도시에 갔다. 그곳의 음대 연주홀에서는 언제나 크고 작은 리허설과 연주가 이루어졌고, 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크지 않은 연주홀을 둘러보기 위해 들어갔을 때, 세 명의 학생들이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하고 있었다. 객석에는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님이 다리를 꼬고 앉아, 한쪽 팔은 의자에 걸치고 한 손은 턱에 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고 계셨다. 학생들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감정을 듬뿍 담아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맨 뒷자리에 앉아 약 15분간 실내악 레슨을 지켜보았다. 몇백 석 규모의 홀에 네 명뿐이었지만, 학생들과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교수님의 열기는 대단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연주곡이 너무 좋았다. ‘이 곡이 뭘까?’ 요즘 같았으면 구글이나 애플뮤직으로 5분 내에 알아냈겠지만,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음악의 스타일을 보았을 때 분명 낭만 시대의 작품이었다. 나는 멘델스존이나 브람스의 곡이 아닐까 짐작했다. 당시에는 MP3에 음악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도서관에 가야만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학교 도서관에서 음반을 대여해 들을 수 있었고, 우선 멘델스존의 트리오부터 들어보았다. 1번과 2번 모두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내가 찾는 곡은 아니었다. 그다음엔 브람스의 트리오 음반을 빌려 들었다. 그리고 첫 음을 듣는 순간 알게 되었다.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1번 B장조(Op. 8) 1악장. 브람스가 20대 초반에 작곡한 곡으로, 듣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음악이었다. 그 순간까지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독일 음대의 연주홀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가 음악을 찾아내기까지 불과 1~2시간 남짓했던 시간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은 그때의 따뜻한 날씨, 실내의 건조함, 도서관의 냄새, 그리고 의자의 불편함까지도 모두 떠오르게 만든다.
브람스의 트리오는 수많은 명반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30년 된 이 음반을 가장 좋아한다.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 첼리스트 지안 왕. 이들이 함께 연주하는 브람스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음반에는 단조인 3번은 제외되고, 장조로 이루어진 1번과 2번만 수록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햇살이 가득하다. 브람스의 음악이 종종 가을을 상징하며 쓸쓸하고 외롭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트리오 1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곡은 긍정적이고 행복하며,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피아노와 첼로로 제시되는 1주제는 내가 꼽는 최고의 선율 중 하나다. 30초에서 40초 사이 첼로의 도약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으며, 그 선율은 듣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생명이 꿈틀대는 느낌을 주는 2악장, 내면의 고요함을 불러일으키는 3악장, 그리고 브람스 특유의 서정성과 심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4악장까지. 이 음반에서 세 연주자는 섬세하면서도 조화롭게, 음악 속 감정을 차례차례 풀어낸다.
1882년, 브람스가 중년에 접어든 시기에 작곡된 트리오 2번은 구조적으로 조금 더 꽉 짜인 작품이다. 브람스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엄격한 편이었는데, 그의 작곡 기법과 정서적인 표현이 이 트리오에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1악장부터 밀도 있는 음악이 시작된다. 피아노와 현악기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음악의 에너지가 점점 커진다. 2악장이 특히 매혹적이다. 헝가리 민속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테마가 있는 변주곡 형식이다. 헝가리풍 음악은 많은 작곡가들이 사랑했지만, 이를 가장 탁월하게 다룬 사람은 역시 브람스다. 6분경 첼로로 시작되는 재현부는 개인적으로 이 곡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3악장의 경쾌하고 톡톡 튀는 스케르초와 서정적인 트리오를 지나, 마지막 4악장으로 이어진다. 밝고 활기차며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4악장은 특히 급격한 악상 변화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음표들로 인해 연주가 까다로운 곡이다. 이 악장에서 피레스, 왕, 그리고 뒤메이의 화려한 연주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브람스의 음악이 결코 쓸쓸하고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진다. 두 곡의 트리오에서 들려오는 선율과 화성은 밝은 빛으로 가득하다. 브람스는 아마도 누구보다도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간 사람이었을 것이다.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브람스 음악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세 연주자의 놀랍도록 균형 잡힌 앙상블과 아름다운 현악기 음색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브람스 음악의 매력을 완벽히 이끌어낸다. 피레스, 왕, 그리고 뒤메이는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음반 작업은 세 사람에게도 분명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영원히 기억될 순간일 것이다. 브람스의 음악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Essential Track | 1번 트랙 (I. Allegro con brio)
몇 번을 추천해도 부족하다. 사려 깊은 피아노 연주 위에 첼로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겹쳐지며 황홀함을 선사한다. 악장의 구조를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브람스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의 감정을 따라 듣다 보면, 긴 악장이 순식간에 지나가게 될 것이다.
https://youtu.be/neyLy-xGgoE?si=tDPy3p1Bx2T2N1kN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