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콜로프 <에스테르하지 궁전 실황>
공연으로는 참 만나기 힘든 음악가다. 나는 유학시절, 딱 한 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피아니스트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날짜와 레퍼토리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감각적인 경험은 그대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학생을 위해 남은 좌석은 드넓은 콘서트홀의 거의 맨 뒷자리 뿐이었다. 그의 연주는 그냥 등받이에 기대어 허공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만 했다. 매 순간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가장 많이 느껴진 감각은 연주 내내 무언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작곡가의 의도인지,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지, 내가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소콜로프는 스튜디오 녹음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발매된 소콜로프의 음반들도 대부분 실황 연주 녹음으로, 그가 직접 선택한 연주들만 정식 음반으로 나오고 있다. 스튜디오 녹음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튜디오에서는 라이브 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생생함과 긴장감을 담아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콜로프는 인터뷰나 공개 강의, 마스터클래스 같은 공식적인 교육 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극도로 내향적이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매우 개인적인 영역으로 유지하려 한다. 그는 오직 연주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전달한다. 소콜로프는 인터뷰에서 “음악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음악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마스터클래스 영상이나 기록은 거의 없다.
또 그는 1990년대 이후부터 오직 유럽 무대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는 공연 횟수와 장소를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며, 장거리 여행을 꺼린다. 따라서 소콜로프의 연주를 직접 경험하려면 유럽에 직접 가야 하며, 그의 모든 최근 공연 기록은 유럽 내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지만 직접 만날 수 없는 연주자'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이다.
공연을 다니다 보면 악보가 잘 보이는 연주가 있고, 그림이 잘 그려지는 연주가 있다. 보통 둘 중 하나에만 속해도 나에겐 꽤 만족스러운 경험이 된다. 그러나 소콜로프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 속한다. 그의 엄격하고 정확한 연주는 언제나 악보의 음표 하나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동시에 그의 음색의 다양성, 터치의 깊이, 그리고 소콜로프 고유의 해석은 항상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2018년, 소콜로프는 작곡가 하이든이 30여 년을 일하며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곳,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에 위치한 에스테르하지 궁전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의 음악을 연주했다. 이 음반은 도이체그라모폰에서 발매되었고, 영상플랫폼 Stage+에서 현장 라이브 영상도 볼 수 있다.
하이든은 50여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고, 그중 대부분은 밝은 생기를 머금고 있는 장조곡이다. 소콜로프는 이날 32, 47, 49번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이례적으로 모두 단조곡이다. 하이든의 후기 소나타들은 형식미,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빈 고전주의 양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하이든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선율과 소콜로프의 꿈틀대는 연주는 하이든 음악을 다시 보게 만든다.
연주의 후반부는 슈베르트의 즉흥곡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D 899와 D 935가 있고 각각 4개의 번호를 갖고 있다. 소콜로프는 D 935 전곡과 D 899 중 4번을 연주했다. 제목은 ‘즉흥곡’이지만, 사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자유로운 듯하지만 각 부분의 전개와 흐름이 정교하게 짜여 있어, 낭만적 감정과 고전적 형식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듣는 것은, 짧지만 매력적인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 길지 않은 소품이지만, 작은 형식 안에서 완전한 음악적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 홀린 듯 음악에 집중하던 관객들은 언제나 본 프로그램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낸다. 나를 포함한 몇몇 애호가들은 소콜로프를 '펭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제나 새하얀 셔츠와 꼬리가 긴 연미복을 입고 무대를 일정한 속도로 드나드는 그의 귀여운(!) 모습 때문이다. 본 프로그램이 무엇이든 소콜로프의 앙코르는 은은한 빛을 내는 보석같다. 이 음반에서는 그의 시그니처처럼 여겨지는 라모, 쇼팽, 드뷔시 등 여러 작곡가의 작은 곡들도 앙코르로 들을 수 있다.
그가 공식적인 마스터클래스를 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의 모든 터치와 소리 안에는 배울 것이 가득하다. 어쩌면 소콜로프의 모든 연주가 음악가들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마스터클래스'일지도 모르겠다.
Essential Track | 18번 트랙 (Préludes, Book 1, L. 117, VI. Des pas sur la neige)
‘눈 위의 발자국’이라는 제목을 가진 곡이다. 클래식 음악의 묘미 중 하나는 매일처럼 새로운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주곡집 안에서는 미처 몰랐던 이 곡의 매력을 이 음반을 통해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드뷔시의 섬세하고 명상적인 이 음악을 소콜로프는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템포로 풀어낸다.
https://youtu.be/q7Kvu24MzEI?si=L0qBzbkmfH0Li-Cd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