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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서정의 부활

보자르 트리오 <아렌스키: 피아노 트리오>

by 안일구
Arensky: The Piano Trios | Beaux Arts Trio | Universal International Music, 1995
아렌스키는 빠르게 잊혀질 것이다.

러시아 음악의 거장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제자인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1861-1906)에 대해 남긴 이 냉정한 평가는 한때 그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아렌스키의 음악은 완전히 묻히지 않았다. 특히 그의 피아노 트리오 1번과 2번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보자르 트리오(Beaux Arts Trio)의 손에서 또다시 생명을 얻었다. 이 음반은 아렌스키라는 다소 덜 유명한 작곡가의 매력을 재조명한다. 그의 서정적인 선율과 섬세한 감성이 현대에 어떻게 울려 퍼지는지를 보여준다.


안톤 아렌스키는 1861년 러시아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의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사사하며 작곡가로서 기반을 다졌고, 1882년 졸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같은 후대의 거장들을 가르치며 러시아 음악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아렌스키의 삶은 그의 음악만큼 빛나지 못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떠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합창단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나, 점차 음주와 도박에 빠져들었다. 결국 건강과 경력을 서서히 무너뜨린 그는 1906년, 결핵으로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재능이 넘치던 작곡가, 러시아 음악사의 한가운데 위치한 음악가, 아렌스키의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세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거의 초자연적이다"
-해롤드 C. 숀버그(Harold C. Schonberg)


보자르 트리오(Beaux Arts Trio)는 1955년 피아니스트 메너헴 프레슬러(Menahem Pressler)를 중심으로 결성된 미국의 전설적인 피아노 트리오로, 반세기 넘게 실내악의 정수를 보여준 연주단이다. 이들은 피아노 트리오의 가능성 자체를 확장한 팀이다. 레퍼토리 측면에서도 고전부터 현대까지 한계가 없었다. 1995년 보자르 트리오는 아렌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1번과 2번을 녹음하며 그의 음악에 담긴 서정성과 비극성을 정밀하게 포착했다. 특히 1번 트리오는 아렌스키 음악의 매력을 극대화한 명연으로 평가받는다.



1894년에 작곡된 첫 번째 트리오는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차이콥스키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낭만적인 선율과 감성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그중 3악장은 작품의 정서적 핵심으로, 아렌스키 음악의 매력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첼로의 깊은 울림으로 시작해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선율이 어우러지고, 피아노가 이를 세심하게 받쳐주며, 보자르 트리오는 과장 없이 절제된 연주로 아렌스키의 서정성을 완벽히 구현해 낸다. 3악장에서 나오는 선율은 4악장에서 다시 한번 감동적으로 재현된다.


나는 늘 1번 트리오만 들어왔지만, 요즘은 2번 트리오를 더 자주 듣게 된다. 피아노 트리오 2번은 1905년에 작곡된 아렌스키의 후기 작품으로,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를 반영하듯 깊고 성찰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복잡한 감정들이 불협화음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오는 매력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을 준다. 세 명의 연주자들은 작품의 어두운 톤과 내면적 갈등을 청자에게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변주곡 형식의 4악장을 추천하고 싶다. 피아노가 담담하게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하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얽히며 음악을 풍성하게 발전시킨다. 5변주의 왈츠는 산뜻하고 따뜻하며, 6변주는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아렌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음악보다는 서유럽적인 정서를 담고 있었고, 독창적인 화성보다는 아름다운 선율과 감성적인 음악을 강조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음악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의 트리오는 차이콥스키의 뜨거운 낭만성이나 라흐마니노프의 짙은 감수성처럼, 한없이 인간적이고 가슴을 울리는 정서를 갖고 있다. 보자르 트리오의 연주는 들을수록 놀랍다. 그들은 단순히 음표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주 내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연주자들은 보다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이를 연주에 담아냈을 것이다.


아렌스키는 인생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보냈다. 타고난 재능은 방탕한 생활 속에서 점차 빛을 잃었고, 결국 그는 일찍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몇몇 음악이 남아있다. 특히 피아노 트리오 1번과 2번은 그의 예술적 유산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여전히 수많은 연주자와 청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아렌스키는 분명 위대한 혁신가는 아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말했듯이, 그는 음악 역사 속에서 잊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자르 트리오가 들려주는 그의 트리오는 그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다. 아렌스키는 결코 잊히지 않았다. 비록 그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생생히 울려 퍼지고 있다.


Essential Track | 3번 트랙 (Piano Trio No. 1 in D Minor, Op. 32: III. Elegia. Adagio)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 번도 듣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렌스키의 깊은 감성, 세 악기의 개별적인 매력, 그리고 수준 높은 피아노 트리오가 선사하는 행복감을 모두 느낄 수 있다.

https://youtu.be/1i079NfSSfY?si=AA3jenPj3owDn0iy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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