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빈 드비엘 <Mirages>
2025년 현재, 사빈 드비엘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프라노 중 한 명이다. 흔히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분류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힘이 있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화려한 기교와 깊은 감성을 동시에 펼쳐 보이며, 듣는 이를 단숨에 매료시킨다. 모차르트부터 현대 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지만, 그녀의 가장 강력한 매력은 역시 바로크 음악과 프랑스 오페라에서 빛을 발한다. 그녀의 팬들은 그녀를 “프랑스의 보석”이라 부르며, 그 따뜻하고 독특한 목소리에 푹 빠져있다.
이 음반의 제목은 Mirages(신기루). 음악을 들어보면 마치 오래된 영화 속 장면처럼 생생하면서도 꿈결 같다. 사빈 드비엘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마치 천사의 음성처럼 빛나며, 현실을 잊고 꿈속으로 떠나게 만든다. 이 음반의 진짜 매력은 단순히 유명한 곡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잘 알려진 꽃의 이중창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곡들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다. 신기루가 익숙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이 음반은 짧은 곡들을 선별해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낸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듯한 곡들이지만, 주제와 가사를 살펴보면 서로 연결되며 전체적인 서사를 이룬다. 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작곡가들이 동양의 이국적인 매력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곡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시 프랑스는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던 시기였다.
첫 곡이 아름다운 선율로 청중을 사로잡은 뒤,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음악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곡은 레오 들리브의 라크메 2막에서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Où va la jeune Hindoue? (어디로 가는가, 젊은 인도의 소녀여?), 흔히 '종의 아리아(Air des Clochettes)'라 불리는 곡이다. 숲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젊은 인도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녀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인도 소녀는 어디로 가나요, / 천민의 딸, 버려진 그녀는? / 커다란 미모사 나무 사이로 / 달빛이 춤추며 속삭일 때…"
4번부터 7번 트랙까지는 모리스 들라주의 '4개의 힌두의 시'이다. 이 네 곡은 각각 다른 시와 도시에서 영감을 받아 인도의 풍경과 감정을 낭만적으로 그려낸 보석 같은 작품이다. 드비엘의 목소리는 다채로운 색깔을 내며 동양의 신비로움과 서정성을 완벽하게 살려낸다. Lahore에서는 마치 한국 전통음악을 연상시키는 선율이 흐르고, Bénarès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독특한 리듬이 귀를 사로잡는다.
다음 트랙에서는 프랑스 음악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 드비엘과 호흡을 맞춘다. 드뷔시의 예술 가곡 '아리엘의 로망스'이다. "밝거나 어두운 호수의 물을, / 여름 하늘의 변하는 거울을, / 그 미소로 환하게 빛나고, / 그 그림자로 슬퍼지는 거울을. / 아아, 사랑하는 마음의 상징이여! / 거기에는 슬픔이, 거기에는 미소가 / 너무도 사랑하는 존재의 / 기쁨과 고통을 비추고 있구나…" 드뷔시의 음악답게, 장조도 단조도 아닌 독특한 화성 위에서 목소리가 마치 바람처럼 움직인다. 이 곡이 끝난 후 드디어 가장 유명한 곡이 등장한다.
"하얀 재스민이 피어나는 두꺼운 돔 아래 / 장미가 함께 모이도록 / 아침에 웃고 있는 꽃밭의 강둑에서 / 자, 함께 내려가자 / 그 매력적인 흐름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자." 레오 들리브의 라크메 중 꽃의 이중창은 소프라노 라크메와 그녀의 하녀 말리카가 함께 부르는 아름다운 듀엣이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꽃을 따는 장면에서 연주되며, 여성 듀엣곡 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마리안 크레바사와 사빈 드비엘의 완벽한 호흡이 이 음악의 매력을 더욱 극대화한다.
지휘자 프랑수아-자비에 로트가 이끄는 레 시에클 오케스트라는 모든 곡에서 빈틈없는 연주를 펼친다. 덜 알려진 곡들도 마치 오랫동안 연주해온 것처럼 능숙하게 다룬다. 특히 앙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햄릿 중 4막에 등장하는 오펠리아의 아리아 À vos jeux, mes amis에서는 10분 넘게 물 흐르듯 음악을 이끌어간다. 이어지는 베를리오즈, 마스네, 쾨클랭의 곡들도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하며, 드비엘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놀라움을 선사하는 곡들이다.
마지막 곡은 라크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을 그린다. "당신은 내게 가장 달콤한 꿈을 주었어요" 이 아리아는 라크메가 제럴드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며, 그와 함께한 시간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노래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사회적,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라크메는 결국 독약을 마시고 제럴드의 품에서 품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빈 드비엘이 2017년에 발표한 Mirages는 듣는 동안 서서히 마음을 울리고, 끝나면 조용한 여운을 남긴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프랑스 음악의 매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흐린 날 더 빛나는 이 음반은 클래식 팬이 아니어도 한 번쯤 들어볼 가치가 있다. Mirages와 함께 잠시 현실을 내려놓고, 사빈 드비엘이 그려내는 신기루 속으로 빠져보길 바란다.
Essentioal Track | 9번 트랙 (Lakmé: Viens, Mallika)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힘을 지닌 음악이다. 워너 클래식이 녹음 현장을 촬영해 공개한 이 영상은 조회수 2천만을 돌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상을 통해 사빈 드비엘이 정성스럽게 만들어낸 음악적 신기루, 음반 Mirages를 접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 30초가량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방식으로 녹음되어, 더욱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https://youtu.be/C1ZL5AxmK_A?si=3hDqcsYT4tiS_Vrm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