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피셔 <바르톡: 오케스트라 음악>
몇몇 헝가리인 친구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헝가리인들, 특히 음악가들은 작곡가 버르토크 벨러를 국가의 문화유산처럼 여긴다. 버르토크에 대해 이야기하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아마도 그의 음악이 헝가리 민속 음악을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피아졸라이고, 체코의 야나체크이다. 헝가리 민속 음악을 집대성한 그의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헝가리 음악 교육과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은 헝가리 오케스트라와 연주자들에게 필수 레퍼토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전 세계의 음악가와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버르토크는 정치적으로 다소 난처한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반대하며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로 인해 20세기 중반 헝가리 공산 정권 아래에서 그의 음악은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위상은 다시 확고해졌고, 오늘날 헝가리에서 버르토크는 국가적 영웅이자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의 그의 동상, 그의 이름을 딴 벨러 버르토크 콘서트홀, 그리고 1983~2018년 헝가리 1000 포린트 지폐에 실린 그의 초상은 그에 대한 존경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유산은 헝가리 음악과 문화 속에서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있다.
1991년 아담 피셔가 헝가리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녹음한 버르토크 음반은 그의 헝가리 음악 해석의 정수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음반에는 '루마니아 민속 춤곡', '두 개의 초상', '춤 모음곡' 그리고 '헝가리의 정경'과 같은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버르토크가 민속 음악과 현대 음악을 결합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색채감 넘치고 리드미컬한 음악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훌륭한 예시다.
아담 피셔는 헝가리 출신 지휘자로서 버르토크의 음악을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명확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해석한다. 피셔는 지나치게 서정적인 표현을 배제하며, 버르토크 음악의 강한 구조적 성격과 리드미컬한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이는 특히 '춤 모음곡'에서 두드러지는데, 이 곡은 1923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가 분리된 지 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으로, 헝가리뿐만 아니라 주변 발칸 지역과 중동 음악의 요소까지 혼합된 다채로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피셔는 개별 악장마다 뚜렷한 성격을 부여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흐름을 유지한다. 또한 민속적 요소를 낭만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원초적인 리듬과 강한 타악기의 비트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마지막 악장에서의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는 피셔의 탁월한 지휘 감각이 극대화되는 순간으로, 오케스트라를 긴장감 넘치는 에너지로 몰아간다.
'두 개의 초상'에서는 보다 서정적이고 인상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작품으로, 피셔는 여기서도 버르토크 특유의 음향적 대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악단을 이끈다. 첫 번째 곡인 Ideal에서는 현악기의 풍부한 음향과 관악기의 몽환적인 울림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깊이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그는 프레이징을 길게 가져가면서도 각 악기군 간의 대조를 분명하게 설정하여 버르토크가 의도한 신비롭고 유동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반면 두 번째 곡 Grotesque에서는 날카로운 리듬과 거친 음향을 활용하여 강렬한 임팩트를 만들며, 이는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색채와는 다른 버르토크의 실험적인 사운드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헝가리의 정경'에서는 버르토크의 민속 음악 연구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원래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후 관현악으로 편곡된 것인데, 전형적인 헝가리 민속 리듬과 선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셔는 이 곡을 연주하면서 버르토크가 민속 음악을 차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방식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Bear Dance에서는 피아노 원곡의 투박하고 힘찬 리듬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관현악기의 음색을 투명하고 과감하게 드러내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Evening in the Village에서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지만, 피셔는 절제된 다이내믹과 정제된 음색을 유지하며 담백하게 연주를 이끈다.
“전통이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키는 것이다.” -버르토크 벨러-
이 음반에서 피셔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직관적이고 생생하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구조적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각 악기군의 개성을 살려낸다. 이를 통해 버르토크 음악 특유의 독창적인 리듬과 화성적 실험성이 한층 더 두드러진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에서도 버르토크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난다. 버르토크가 말한 ‘불’, 그가 원했던 연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아담 피셔와 헝가리 국립 교향악단의 이 음반은 명연주를 넘어, 헝가리 민속 음악과 현대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버르토크 음악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많은 음악가들의 노력이 담긴 가치 있는 작품이지만, 그냥 틀어놓고 듣기에도 무척 좋다. 헝가리로 여행을 가려면 많은 시간과 제약이 따르지만, 음반은 재생하기만 하면 된다. 듣다 보면 헝가리인들의 정서도, 헝가리의 풍경도 고스란히 느끼고 볼 수 있다.
Essentiol Track | 21번 트랙 (Romanian Dance, Sz. 47a)
사실 버르토크는 헝가리만의 자랑이 아니다. 동유럽권 전체의 자랑이다. 이 음반의 처음과 끝에는 루마니아의 민속 춤곡이 들어있다. 버르토크는 1900년대 초반부터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 전역을 다니며 전통 민속 음악을 채록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는 헝가리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민속 음악도 포함되었고, 루마니아의 음악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루마니아 지역을 방문해 현지 농민들과 집시 음악가들이 부르는 전통 선율을 직접 녹음하고 채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음반의 마지막에 바르톡이 이렇게 수집한 음악을 바탕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 담겨 있다.
https://youtu.be/i7qTxuILoOw?si=7TI14bywqp23HfuC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