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연주자 1 <음악저널 2025년 2월호>
-내가 사랑한 연주자
연주자는 음악의 통로이자 전달자다. 음악은 다른 예술 작품과 달리, 연주자를 통해 소리로 구현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전에는 단지 악보라는 종이 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악보는 연주자가 작곡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소통 창구다. 출판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소리로 구현되고 해석되는 과정에서는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다.
연주자로 공부하고 활동하는 동안, 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많이 경험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연주자의 공연이나 음반을 접할 때가 특히 그렇다. 이런 연주자들은 오랜 노력으로 얻은 뛰어난 기술과,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전달된 음악은 단순한 소리를 넘어, 청중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전한다. 나에게 있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연주자는 언제나 이 사람이다.
-에마뉘엘 파위, 현대 플루트 연주의 아이콘
"어떤 곡을 연주하든, 이 곡이 지금까지 작곡된 모든 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믿어야 하며, 당신에게 가장 깊은 의미를 전달하는 텍스트라고 여겨야 합니다." -에마뉘엘 파위
파위의 연주를 라이브로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표정, 몸짓, 호흡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곡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믿음으로 음악을 만끽한다. 23세에 베를린 필하모닉에 플루트 수석으로 입단한 에마뉘엘 파위는 수많은 음반과 연주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관악기 연주자이자 현대 플루트 연주의 상징이 되었다.
현대 플루트 연주의 역사는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7년, 테오발트 뵘(Theobald Boehm)이 금속 플루트를 개발하며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고, 이후 폴 타파넬과 필리프 고베르가 프랑스 플루트 악파의 기틀을 다졌다. 이 전통을 차례로 이어받은 두 사람이 장 피에르 랑팔과 제임스 골웨이다. 이들은 플루트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이 악기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했다. 랑팔과 골웨이의 인기와 영향력은 대단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플루티스트가 두 사람의 소리와 해석을 쫓았다.
하지만 1970년생 프랑스-스위스 출신의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위는 이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솔로 활동에 전념하기보다 오케스트라 활동을 꾸준히 병행했으며, 무엇보다 연주 스타일과 음색이 기존과 완전히 달랐다. 우선 기술적으로 플루트 안쪽으로 최대한 많은 바람을 불어넣던 기존의 플루티스트에 비해, 파위는 악기 바깥으로 나가는 바람을 음색에 적극 활용했다. 피스나 리드가 없는 유일한 악기인 플루트는 이 지점이 참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파위는 단단하고 옹골찬 음색보다 폭이 넓고 자유로운 음색으로 연주했다. 또한 자신만의 특정한 음색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작곡가가 만들어놓은 음악에 맞춰가는 음색으로 연주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연주를 펼쳤다.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아우르며 경계를 두지 않고 실험적인 연주를 거듭해 나갔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이런 파위의 연주 스타일은 많은 연주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호불호를 낳았다. ‘바람소리가 너무 많은 음색이다’, ‘템포 설정이 잘못되었다’, ‘실제로 들으니 별로다’ 등. 많은 플루티스트들이 파위의 연주 스타일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같은 나이대의 다른 플루티스트들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파위를 제외한 다른 플루티스트들의 연주는 언제나 랑팔 또는 골웨이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어떨까?
우선 파위의 음색과 연주 스타일은 이제 모든 플루티스트들의 표준이 되었다. 나도 학창 시절 파위의 모든 연주를 참고하고 모방해서 내 성장을 도모했다. 결국 프로 연주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자신만의 색깔을 확립해야겠지만, 여전히 파위는 플루티스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 중요한 것을 증명해 주었다. 이전 세대의 연주를 꼭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플루트 연주에 어떤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며,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낸다면 어떤 실험도 스타일도 결국에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파위의 명연과 추천 음반
에마뉘엘 파위의 업적과 생애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그의 음반과 연주를 소개하고 싶다. 먼저 그의 모차르트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 녹음한 음반,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G장조 협주곡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콘서트홀에서 볼 수 있는 D장조 협주곡 연주, 그 외의 소나타와 실내악 연주까지. 모든 연주가 반짝반짝 빛나는 결과물이다. 특히 모차르트가 쓴 두 개의 플루트 협주곡은 플루티스트의 명함같은 것이다. 파위의 모차르트는 완성도도 높지만 순간의 즐거움과 즉흥성을 흠뻑 느낄 수 있다.
모차르트를 제외하고 수많은 음반 중에 딱 하나를 꼽자면, 1998년에 발표한 <Paris>가 단연 최고의 선택이다.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플루트 레퍼토리와 연주법에 대해 모든 것이 담겨있다. 풀랑크, 상캉, 이베르, 뒤티외, 메시앙, 미요, 졸리베까지. 혹시 생소한 작곡가라 느껴진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음악들은 한 번만 들어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파위와 피아니스트 에릭 르 사쥬(Eric Le Sage)는 젊은 시절부터 파리 고등음악원 출신의 핵심 연주자들로 프랑스 음악의 정수를 들려준다.
유튜브 영상으로만 있는 연주도 딱 하나만 추천하고 싶다.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중 ‘렌스키의 아리아’ 연주다. 에마뉘엘 파위가 왜 최고의 플루티스트인지를 빠짐없이 설명해주는 영상이다. 플루트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이 영상을 발견한 이후 수백 번은 들었다. 파위는 일류 성악가 못지않은 프레이즈와 표현력을 보여준다. 플루트는 음색과 음량이 다소 한정적일 수 있는 악기인데, 파위의 플루트는 그 어떤 악기보다 다채롭고 풍성하다. 감정적으로도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인생에 대한 허망함이 악기 한 대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4:40초쯤 이 연주를 지켜보는 제임스 골웨이의 모습이 비춰진다.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의 플루트 대가 제임스 골웨이와 엄청난 기량을 가진 젊은 음악가 파위의 모습에서 시대의 흐름까지 느껴볼 수 있다.
-파위가 남긴 선물
베를린 필하모닉 관악기 파트 전체를 이끄는 스타이면서, 그의 솔로 활동과 업적은 이미 이전 세대의 모든 연주자들을 넘어섰다. 파위의 플루트 음색은 점점 발전하며 풍부한 울림과 섬세한 음색 팔레트를 가지게 되었고, 연주력은 여전히 성장 중이다. 바로크, 고전, 낭만의 거의 모든 시대의 플루트 음악을 음반과 라이브 공연으로 발표했고, 특히 모차르트, 라이네케, 이베르, 닐슨 등 플루트를 위한 주요 협주곡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연주해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현대 작곡가들인 피에르 불레즈, 엘리엇 카터, 외르크 비드만의 곡을 비롯해 매해 수많은 현대 작곡가 작품을 초연하며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척하고 있다. 1993년에 에마뉘엘 파위는 에릭 르 사주, 폴 메이어와 함께 살롱 드 프로방스 여름 음악 페스티벌을 설립했고, 최고 수준의 목관 5중주 연주를 선보이는 ‘레 벙 프랑세‘의 투어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런 연주자의 진가와 가치는 현장에서 직접 들을 때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2025년, 파위는 '레 벙 프랑세' 공연과 베를린 필하모닉 무대로 한국을 찾아올 예정이다.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2번, D장조
https://youtu.be/DHzAIsrlJDM?si=ek93a3tEbK4ijRrF
차이콥스키, 렌스키의 아리아
https://youtu.be/HsUB38k_nmU?si=-uTDz6UprYWYtAK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