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연주자 2 <음악저널 2025년 4월호>
라르스 포그트 Lars Vogt
"내가 마지막 날을 맞이하더라도, 나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 -라르스 포크트
라르스 포그트(Lars Vogt)는 독일 출신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그는 2021년에 식도암 진단을 받았고, 이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포그트에게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연주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연주하기‘를 멈추지 않던 포그트는 2022년 9월 5일, 불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그의 강인한 의지와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잘 보여준다.
진실된 울림을 향한 여정
"음악은 삶의 반영이며, 연주는 그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독일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라르스 포그트의 피아노 연주는 마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화려한 기교나 과장된 표현보다는 진솔한 감정과 깊이 있는 해석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그가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설명해 주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1970년 독일 뒤렌에서 태어난 라르스 포그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일찍이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0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포그트는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탁월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특히 슈만과 브람스의 음악에 대한 그의 해석은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슈만의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들을 특유의 따뜻하고 진솔한 음색으로 표현해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슈만의 음악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한다. 브람스 해석 역시 독보적인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그의 브람스 연주 영상 아래에는 이런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브람스가 오늘 라르스를 개인적으로 하늘로 데려갔다.”
이외에도 포그트는 특정 스타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아우르며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 그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모차르트 소나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들은 그 깊이와 아름다움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는 악보에 담긴 작곡가의 의도를 깊이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담백하고 소박한 연주 속에서도 깊은 울림과 감동이 스며 있었으며, 악보 속에 숨겨진 감정과 흐름을 본능적으로 포착해 듣는 이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음악을 선사했다. 그의 음악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는 독주자로서뿐만 아니라 실내악 연주자, 그리고 지휘자로서도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특히 실내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특히 인생의 마지막에서 테츨라프 남매와 함께 남긴 기록은 가장 빛나는 포그트의 유산이다. 라르스 포그트는 연주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2013년 독일 뒤렌에 '슈판눙엔' 음악 페스티벌을 창설하여 젊은 음악가들에게 연주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 사회에 클래식 음악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또한, 그는 암 투병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음악 활동을 이어가며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었다. ‘슈판눙엔’ 페스티벌에서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s://youtu.be/J1uu22e_IiI?si=Pogu_QXXB6n8Dfos
포그트의 걸작들
라르스 포그트의 주요 음반들은 그의 음악적 깊이와 협업의 결실을 잘 보여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Ondine 레이블, 2017-2018)
포그트는 로열 노던 신포니아와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며 자신의 음악적 여정을 집대성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그의 건강 악화와 맞물려 진행되었기에 더욱 의미 깊다. 그의 베토벤 연주 역시 드러나는 화려함 보다는 내면의 서정성과 철학적 울림을 강조했다.
-브람스: 피아노 사중주 2 & 3번 (Ondine, 2024)
포그트의 사후 발매된 음반으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르바라 분트로크, 타냐 테츨라프와 함께 녹음했다. 이 앨범은 그의 병마 속에서도 완성된 유작으로, 브람스의 풍부한 감성과 실내악의 섬세함을 담고 있다. 평생을 음악적 동료로 지낸 테츨라프 남매와 분트로크와 함께 이뤄내는 조화와 에너지는 어떤 음반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슈만: 다채로운 소품들, 크라이슬레리아나, 피아노 협주곡 (Warner Classic, 2022)
포그트의 슈만 해석을 다채롭게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음반이다. 사이먼 래틀,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만들어낸 협주곡 연주는 시원한 템포 흐름 속에서도 모든 디테일이 살아있는 명연주이다. 크라이슬레리아나와 다채로운 소품들에서도 슈만 특유의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 24번 (Ondine, 2023)
그는 오케스트르 드 샹브르 드 파리와 함께 가장 사랑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녹음했다. 하나는 모차르트가 20대 초반에 작곡한 생기 넘치는 피아노 협주곡 9번 ‘주놈(Jeunehomme)’,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많은 이들이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피아노 협주곡 24번이다. 자신의 병을 알게 된 포그트에게 모차르트 음악은 일종의 치료제였다.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존경과 삶에 대한 애착이 담겨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업은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포그트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피아니스트(Pianist in Residence)"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졌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의 힌데미트 작품 녹음, 사이먼 래틀과의 베토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키릴 페트렌코와의 베토벤 협주곡 3번 연주 등은 모두 놀라운 작업이었다. 일부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콘서트홀에서 여전히 감상할 수 있다.
https://youtu.be/JODU5UBPK2Q?si=tM4TVfYu7YM5-daP
포그트의 유산
라르스 포그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단순한 음반이나 연주를 넘어, 예술가로서의 삶의 태도와 철학으로 확장된다. 그는 음악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전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에도 무대에 서고 녹음을 이어간 그의 모습은, 예술이 삶의 끝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음악 해석은 고전과 낭만주의의 비롯한 모든 피아노 레퍼토리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포그트는 음악이 가진 진정성과 깊이를 탐구하며, 작품들을 현대 청중에게도 공감 가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음악이 시대를 초월해 울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포그트는 힘들었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으로 삶을 긍정했다. 그는 음악을 통해 "나무를 심었고", 그 나무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