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in 통영
-이하느리
임윤찬의 위촉으로 연주된 이하느리의 작품은 짧지만 매력적이었다. 통영의 노을을 바라보다가 공연장에 들어가서 그런지, 음악이 노을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반음과 온음이 공존하는 2도 음정, 그리고 이를 뒤집어 형성되는 7도 음정이 귀에 자주 들려왔다. 과거에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정으로 여겨졌지만, 이하느리의 곡에서는 모든 요소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제목 앞뒤에 '...'이 붙어 있는 것처럼,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음악이었다. 이날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는 애피타이저 역할을 했다.
-오리너구리
전통과 현대, 익숙함과 파격, 고전과 실험이 한 몸에 녹아든 임윤찬의 연주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의외로 오리너구리였다. 오리너구리는 포유류처럼 보이지만 알을 낳고, 오리의 부리와 비버의 꼬리를 가졌다. 익숙하지 않은 외모를 지닌 데다, 독까지 품고 있다. 기존의 틀 안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오리너구리는 그냥 오리너구리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특징들이 한 몸에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며, 자연 속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어찌보면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작품은 예측할 수 없으며, 누군가에게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독특함이 하나의 표준이 되거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예술가는 결국 기존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생태계를 개척하는 존재다.
-해석의 여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연주자의 해석 여지가 넓은 곡일까, 아니면 제한된 곡일까? 사실 두 가지 모두 해당한다. 바흐의 악보를 보면, 대부분의 바로크 시대의 악보처럼 엄격한 음표 외에는 특별한 표시도 없다. 강하게 연주하라는 포르테(f)나, 여리게 연주하라는 피아노(p) 같은 표시조차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낭만주의나 현대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해석의 여지가 더 넓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바흐가 작곡할 당시의 건반악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한다면 더욱 그렇다. 반대로, 해석의 여지가 매우 좁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이미 거의 모든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버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애플 뮤직에서 검색해 보면 700개 이상의 음반을 찾을 수 있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악보를 통해 거의 모든 실험을 해왔다. 템포, 악상, 감정의 깊이 등 원하는 대로 골라 들을 수 있는 것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고, 매 순간 예상을 깨는 완전히 새로운 버전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날 임윤찬의 연주에서 나왔다. 가능했다.
-아리아, 처음과 끝
도돌이를 해서 변화를 준다는 점을 제외하면, 1시간이 넘는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은 완전히 같다. 클래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머금고 있는 이 주제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음색의 투명함, 음의 밀도와 농도를 조절하는 모습, 할아버지 하프시코드 연주자처럼 자연스러운 장식음들, 악보 위의 음표들을 눈앞에 그려지게 하는 시각화, 음악과 프레이즈에 맞춰 템포를 조절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도돌이를 통해 변화를 줄 때, ‘디테일이 악마다’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작은 변화도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30개의 변주곡이 끝난 후, 마지막으로 다시 아리아가 울릴 때 수많은 감정이 밀려왔다. 마치 꿈에서 깬 것 같기도 하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임윤찬은 마지막 음,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음의 아포자투라(전타음, 파#)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마치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듯이.
-변주들
연주자는 전달자이기도 하지만 일부 창작자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변주 하나하나는 그냥 말 그대로 새로운 생명체였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인데 다 초면이었다. 익히 아는 곡이 어떻게 이렇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이럴 때 우리의 반응은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반가움 또는 거부감. 과거 역사를 보면 언제나 처음에는 거부감이 반가움을 이겼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그랬고, 프란츠 카프가의 <변신>이 그랬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해석이나 작품에 대해, 통영에서 매일 무대에 오르는 현대곡에 대해서도, 거부감보다는 반가움이 커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모든 새로운 해석을 무조건 반길 수는 없다. 하지만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는 나에게 반가움의 연속이었다. 현장에서 울리는 소리의 퀄리티와 연주자가 발산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어떤 새로운 것이든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13번과 25번
물론 더 많지만 딱 두 개만 꼽고 싶다. 13번 변주는 친절하고 상냥한 시작과 중간에 끼어드는 불협화음의 신선함으로 가장 좋아하는 번호다. 이날은 12번 변주까지 모든 변주가 독창적인 해석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했고, 그래서 더 13번 변주가 따뜻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친절함을 넘어서 몸과 마음을 붕 뜨게 만드는 해석이었다. 아주 세심하게 컨트롤된 음들은 하나하나가 몸에 닿아 스치는 듯했다. 12번 변주가 단단히 준비해 주고, 13번이 펼쳐진 후 14, 15번으로 전반부가 마무리되는 부분은 꼭 다시 듣고 싶다. 그 후 이어지는 드라마와 아이디어를 차례차례 지나며, 기대감이 하늘에 닿은 상태로 25번 변주가 시작되었다.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의 낙차, 오른손과 왼손이 완벽하게 분리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를 반복하는 음뭉치들, 완전히 새롭지만 분명한 감정 전달과 프레이즈 설정까지, 모두 놀라웠다. 어떤 요소든 최대치로 표현되며 황홀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25번 변주를 준비하는 24번 변주부터 폭풍우 같은 26~29번 변주, 그리고 장대한 수채화 같은 30번 변주까지. 다시 듣고 싶다. 임윤찬의 공연은 표를 구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음반이 꼭 나와야 한다. 그래야 13번 변주와 25번 변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
-바흐와 임윤찬
작곡의 계기를 토대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자장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바흐가 만든 이 작품은 결코 자장가가 아니다. 바흐는 단순하고 투명한 베이스 선율이 얼마나 큰 폭으로 발전하고 어떤 세상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음악으로 보여주었다. 이를 일깨우듯, 임윤찬은 앙코르로 그 단순하고 투명한 베이스 라인을 연주했다. 어린아이의 꿈처럼 시작된 주제는 변주를 거듭하면서 우주 전체를 품을 수도 있는 거대한 음악으로 발전했다. 바흐 시대에 바흐의 음악은 현대음악이었다. 매 순간이 예외의 연속이었다. 독창성의 끝이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경지였다. 내가 느끼기에 임윤찬의 작업은 바흐의 작업과 닿아 있었다. 음표 외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종이 악보가 품고 있는 가능성. 임윤찬은 그 모든 가능성을 피아노 위에 꺼내놓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바흐가 단순한 베이스 라인 위에 우주를 쌓은 것처럼 임윤찬은 바흐의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대치를 탐구하고 있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부터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할 생각에 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던 임윤찬이었다. 그토록 설레며 연주하기를 고대하던 이유를 이제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준비하느라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지금 얼마나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