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파블로 페란데스 & 선우예권 리사이틀
통영에서 아쉽게도 단 두 개의 연주만 듣고 돌아왔다. 그래도 알찼다. 2025년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 음악가로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첼리스트 파블로 페란데스가 선정됐다. 30일 오후 3시에는 파블로 페란데스와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1991년생 스페인 출신인 페란데스는 2015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데뷔 앨범 Reflections를 발매해 독일의 권위 있는 오푸스 클래식 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와 함께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녹음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선우예권은 솔리스트로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듀오 리사이틀의 파트너로서도 뛰어난 연주를 선보인다. 이는 여러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지난해 통영에서도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위와 인상적인 리사이틀 무대를 펼쳤다.
1부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가 첫 곡이었다.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로 가끔 들었던 곡인데, 오늘은 페란데스의 첼로 선율이 시작되자마자 뜻밖의 음악이 떠올랐다. 바로 '라 폴리아'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춤곡에서 유래해 16~18세기 동안 유럽에서 유행한 유명한 선율이다. 비슷한 리듬과 선율 진행으로 인한 우연이겠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라이브 듣는 맛’이 아닐까 싶다. '콜 니드라이'는 유대교 전통 선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기도이다. 페란데스는 긴 예비박을 갖고 섬세하게 첫 첼로 소리를 울렸다. "무슨 첼로 소리가 이렇게 좋지?"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깊고 부드러웠다. 페란데스는 어떤 음형을 연주하더라도 다음 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음가를 충분히 살리며, 음악을 수평으로 펼쳐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하나의 긴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가는 듯한 연주였다. 원래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지만, 선우예권의 섬세한 연주 덕분에 마치 원래부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곡처럼 느껴졌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에서는 테마 제시부터 남달랐다. 강하게 시작하는 대신 차분하면서도 완벽한 프레이징으로 연주해,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주제 제시에서 공을 들인 덕분에 이후 흐름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반복 구간에서는 적절한 변화를 주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피아노는 첼로와 대등한 밸런스를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유연하면서도 변화무쌍한 베토벤 소나타였다. 소리를 갑자기 키우거나 줄이는 순간, 도약을 크게 하는 부분, 피아노와 첼로가 함께 앞으로 질주하는 장면, 잔잔한 피아노 위에서 첼로가 우아하게 노래하는 순간들이 인상 깊었다. 기대를 한껏 품었던 3악장의 첫 부분 아다지오 칸타빌레는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연주였다. 영롱한 피아노 사운드가 홀을 가만히 뒤덮고, 첼로가 스며들듯이 등장해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노래했다. 머지않아 알레그로 비바체가 나오자 두 사람의 놀라운 테크닉이 빛을 발했다. 질주하는 템포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합을 이뤄냈다. 그야말로 쾌주, 호연이었다.
2부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전체적으로 조금 빠른, 흐르는 템포 속에서 진행되었다. 템포가 빠르면 자칫 급하게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디테일하게 보자면, 페란데스는 음 단위로 세밀하게 컨트롤하는 연주자였다. 거쳐가는 음들도 필요하면 비브라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시종일관 노래했다. 넓게 보자면, 흐르는 템포 덕분에 긴 프레이즈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선율이 시작될 때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로 음악을 조명하면서 점점 풍성해졌다. 연주자가 만들어놓은 기승전결이 워낙 철저하다 보니, 청중도 그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1부의 첫 곡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로, 굳이 백스테이지로 들어가지 않고 잠깐 인사를 나눈 뒤 브람스 소나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체로 두껍고 짙은 색채로 연주되는 첫 주제를 페란데스는 비교적 가볍고 분명한 프레이징으로 풀어냈다. 뒤이어 나오는 선우예권의 연주도 짓누르는 느낌 없이 공간감을 충분히 살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전형적으로 무거운 단조곡이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산뜻했다. 시작이 덜 무겁게 다가오니 여러 장점이 있었다. 첼로와 피아노의 대등한 대화가 또렷하게 전달되었고, 음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스펙트럼이 더 넓게 형성되었다. 매력적인 성격을 지닌 2악장과 3악장에서는 두 사람이 몸이 풀린 듯 조금 더 자유롭게 연주했는데, 순간적으로 타이밍이 맞지 않는 부분도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연주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연주가 더욱 재밌다. 2악장에서의 ‘낭만 버전 미뉴에트’는 독특한 개성을 띠었으며, 페란데스 특유의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난 악장이었다. 3악장의 빠르고 격렬한 푸가에서도 두 사람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으면서도 두 악기와 각 성부 간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쿨하게 곡을 소화해냈다.
앙코르, 페란데스와 선우예권
감사하게도 페란데스의 연주 스타일을 듣고 공연 초반에 혼자 머리속에 곧바로 떠올린 곡을 앙코르로 연주해 주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3악장. 꿈결 같은 피아노 연주에 페란데스의 우아한 첼로 소리가 더해졌다. 함께 감정적으로 고조되다가 장조와 단조를 넘나드는 부분은 완전히 황홀경이었다.
페란데스의 연주는 첼로가 표현할 수 있는 레가토의 극한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모두 시종일관 노래하고 있었다. 왼손의 까다로운 도약과 줄 간 이동이 시각적으로는 보였지만, 소리로는 전혀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손의 활 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활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첼로 소리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페란데스는 1689년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Archinto"첼로를 연주하고 있다고 들었다. 300년이 넘은 명기와 훌륭한 연주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는 신비로울 정도였다.
선우예권 역시 언제나처럼 흠잡을 데 없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는 언제나 아주 어려운 레퍼토리를 마치 쉬운 곡처럼 자연스럽게 연주해 버린다. 게다가 색깔이 강한 연주자와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앙상블을 소화한다. 상대가 하고 싶은 연주를 너무나 편하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들으면서 가끔은 피아노가 조금 더 강한 주장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연주했다면, 이날과 같은 완벽한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즉흥성과 완성도
나는 즉흥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연주를 좋아한다. 즉흥성은 연주자의 개성과 해석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이날의 연주는 굉장히 독특했다. 페란데스와 선우예권은 무대에서 즉흥적인 변화를 과감하게 드러내기보다, 이미 철저하게 준비된 음악 안에 유연함과 즉흥성을 담아냈다. 마치 모든 순간을 계산한 듯 보였지만, 그 안에는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연주를 딱딱하게 느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즉흥성이 가득한 연주로 받아들인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음악적 모험을 최소화하면서도, 즉흥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이들의 해석은 완벽하게 준비된 자유로움이었다. 결국 즉흥성이란 단순히 순간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음악 속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연주 준비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