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숄 x 헨리 퍼셀 <O Solitude>
“목소리는 음악을 섬겨야지, 그 반대여선 안 된다.”
— 안드레아스 숄
이 한 문장 안에 안드레아스 숄이라는 음악가의 철학이 다 들어 있다.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테크닉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도 듣는 이의 심장을 건드리는 목소리. 안드레아스 숄의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 시절 다녔던 독일 마인츠 음악대학에서 안드레아스 숄의 마스터클래스를 참관한 적이 있다.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목소리를 눈앞에서 들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몸이 반응하는” 소리였다.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물리적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모든 악기 연주자들은 내 악기가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깨달았다. 그냥 '사람 목소리가 최고다'라고. 그리고 모든 악기 연주자들의 목표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사람의 목소리는 기계나 금속, 활과 현조차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존재다. 안드레아스 숄은 그 고유한 것을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잘 간직해온 고마운 인물이다.
그는 카운터테너다. 카운터테너는 남성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대, 주로 알토나 소프라노 음역을 소화하는 독특한 성부다. 특히 숄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카운터테너라는 성부 자체의 인식을 바꾼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 목소리가 단지 시대악기 연주의 장식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음악의 장르라는 것을 알린 거의 최초의 존재다. 숄 이전에도 카운터테너는 있었지만, 숄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 소리에 감탄하고, 더 나아가 공감하기 시작했다. 바로크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이 성부를 메이저 레이블, 전 세계 무대, 그리고 심지어 대중적 인지도로까지 이끌어온 주역도 역시 숄이다. 그런 음악가가 이 음반에서는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을 만난 것이 이 음반이다.
데카(Decca) 레이블로 발표한 음반 <O Solitude>는 그의 오랜 커리어 중에서도 꽤 특별한 순간이다. 숄이 헨리 퍼셀을 정식으로 녹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퍼셀은,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사랑한 작곡가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사람의 목소리를 위해 곡을 쓰고 또 편곡했지만, 퍼셀의 음악은 유난히 목소리를 신뢰한다. 퍼셀의 음악을 듣다 보면, 목소리가 모든 감정을 전달해줄 거라고 믿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곡마다 극적인 설정이 없어도, 화려한 기교가 없이도, 목소리가 그 자체로 감정이 되는 음악이다. 그래서 이 음반은 숄이라는 사람의 유니크한 목소리와 퍼셀이라는 작곡가의 조우라는 점에서, 목소리 음악의 힘과 음악 그 자체의 목소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앨범의 타이틀곡 <O Solitude>는 이 음반의 정서적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감정만큼은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 숄의 목소리는 이 곡에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떤 낭만적 관념이 아니라, 고요하고 무심한 현실로 끌어내린다. 듣고 있으면 외롭다와 아름답다가 합쳐진 듯한 기분이 든다. 퍼셀의 감정 세계가 이 곡을 통해 넓고 깊게 펼쳐진다. 널리 알려진 아리아 <When I Am Laid In Earth>도 이 앨범에서 들을 수 있다. ‘디도의 라멘토’로도 알려진 이 곡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그런 수식어는 언제나 다소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 곡이 갖는 정서적 무게는 분명하다. 디도가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이 마지막 노래는 오페라라는 장르의 극적 순간이자,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정적을 품은 음악이다. 숄은 이 곡을 슬프게 부르지는 않는다. 감정을 과장하거나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신념대로 아주 차분하게 음악을 결대로 따라간다. 그런데 그래서 더 슬프다.
이 음반의 또 다른 매력은, 숄이 선택한 곡의 스펙트럼이다. 무대 위 오페라 아리아부터 개인실을 위한 가곡, 교회에서 불릴 찬송가까지. 이건 그저 한 작곡가의 음악을 모은 것이 아니라, 퍼셀의 작곡 세계를 복원하는 작업처럼 느껴진다. 이런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것 같다. 어디에 쓰였는지가 꼭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남겨진 감정의 폭이다. 숄은 담백한 숨으로 이 감정의 폭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숄이 리사이틀에서 자주 불렀던 곡과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곡이 나란히 담겼다. 그래서 익숙함과 낯섬이 동시에 담긴 앨범이라는 느낌도 든다. 앙상블 아카데미아 비잔티나의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숄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이 앙상블은 퍼셀 음악의 이탈리아적 면모를 섬세하게 살려낸다. 과도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각 곡의 구조와 텍스처를 섬세하게 조명한다. 덕분에 이들은 ‘목소리’라는 키워드를 다층적으로 펼쳐낸다. 사람의 목소리, 악기의 목소리, 작곡가의 목소리, 그리고 어쩌면 청중의 목소리까지 들어있는 것 같다.
<O Solitude>는 대단히 정적이고 조용한 음반이다. 단 몇 곡을 제외하면, 전체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흘러간다. 그런데 그 안에서 이토록 풍부한 감정이 나온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가 다시 목소리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든다. 기술도, 편곡도, 레이블의 포장도 아닌. 그냥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악기인 목소리가 돋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안드레아스 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면, 이 목소리를 단순히 ‘카운터테너’로만 부르긴 부족하다. 그냥 음악이다. 아주 좋은 음악.
Essentioal Track | 마지막 트랙 (Dido's Lament)
아주 힙한 음악이 있다. 마지막 트랙은 헨리 퍼셀의 <When I Am Laid In Earth>(디도의 라멘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이다. 전자음악 프로듀서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과 리코 코닝(Rico Conning)이 함께해, 고전의 비애를 전자음향의 감각으로 되살려냈다. 숄의 깊고 맑은 음색과 오빗의 몽환적인 전자사운드가 어우러지며, 바로크와 일렉트로닉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이며 감각적인 트랙이 완성됐다. 설명이 필요 없다. 그냥, 계속 듣게 된다.
https://youtu.be/a1tJkhgWc6E?si=Vnccm_c5_x7KiP7R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