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겐 콰르텟 <베토벤, 슈베르트 현악4중주>
1981년, 잘츠부르크에서 결성된 하겐 콰르텟은 오랜 시간 실내악 무대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유지해왔다. 이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멤버 대부분이 한 가족이라는 점이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연주에서도 자연스러운 호흡이 묻어난다. 처음부터 함께해온 이들은 긴 시간 동안 무대를 함께하면서도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음악 안에 조용히 담아두고, 구조와 밀도에 더 집중하는 방식은 하겐 콰르텟만의 고유한 태도다. 톤 쿠프만,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체헤라 같은 거장들과 협연할 때도 그 중심은 늘 자신들에게 있다. 누구와 함께하든, 이들은 자기만의 색과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특징은 그들의 연주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때로는 오래된 책을 넘길 때 나는 종이 냄새처럼, 묘하게 아날로그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특히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후기 작품을 연주할 때는 그 느낌이 더욱 분명해진다. 감정을 다루되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음악의 구조 안에 스며들도록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소 차갑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서서히 진심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감정과 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곡일수록 이들의 방식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하겐 콰르텟은 어떤 음 하나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지만, 그 계산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그 음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듯한, 자연스러운 필연으로 들린다.
Op.135는 베토벤이 남긴 마지막 현악 4중주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간결한 인상을 주지만, 마지막 악장에 이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Muss es sein? – Es muss sein(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라는 질문과 대답이 음악 안에서 펼쳐지고, 그 안에는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듯한 울림이 담겨 있다. 하겐 콰르텟은 이 곡이 가진 깊이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연주자들이다. 각 악장의 성격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 흐름 안에서 음악이 스스로 말하도록 한다. 첫 악장의 밝은 리듬은 절제된 연주 속에서도 생동감이 살아 있고, 2악장은 마치 잘 조율된 기계처럼 단단하게 돌아간다. 3악장은 정지된 듯한 고요함 속에서 베토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마지막 악장은 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단호함을 전한다. 묵직한 철학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억지로 강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결론에 닿게 만든다.
‘죽음과 소녀’는 슈베르트가 남긴 현악 4중주 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선율을 쓰는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음악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의식해야 했던 슈베르트의 불안과 체념,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네 개의 악장 안에 녹아 있다. 하겐 콰르텟은 이 곡을 과하게 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절제된 방식으로, 슈베르트의 감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2악장의 변주곡은 가곡 ‘죽음과 소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 선율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죽음과 소녀가 서로 말을 아끼며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다. 1악장의 거친 리듬도 무작정 밀어붙이지 않고, 오히려 느린 속도로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감은 공포보다는 조용한 저항에 가깝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되, 쉽게 물러서지 않는 태도다.
하겐 콰르텟은 이 두 작품으로 음반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말 없이 많은 걸 전달한다. 연주자는 결국 전달자라는 점에서, 이들의 접근은 아주 정직하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말년에 다뤘던 주제를 하겐 콰르텟은 깊고 또렷하게 들려준다. 삶과 죽음, 운명과 수용. 서로 다른 방식의 질문이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다가간다. 하겐 콰르텟은 두 작곡가의 마지막 목소리를 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그 울림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실내악의 진짜 깊이를 알고 싶다면, 이 음반은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듣다 보면, 거창한 마무리라기보다는 조용한 작별 인사처럼 다가온다. 세상과 거칠게 맞섰던 베토벤도, 조용히 스러졌던 슈베르트도 결국에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음악 안에 마지막 발걸음을 남겼다.
Essential Track | 5번 트랙 (Schubert: String Quartet No. 14 in D Minor, D.810 -"Death and the Maiden": 1. Allegro
가장 유명한 악장인 1악장에서 하겐 콰르텟은 감정을 거칠게 쏟아내기보다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긴장으로 곡을 이끌어간다. 음악은 격렬하게 휘몰아치지만, 단 한 음도 흘려보내지 않고 치밀하게 조율되어 있다. 날카롭고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절제된 어조를 유지하며, 단단하고 우아한 음색으로 고통을 전달한다.
https://youtu.be/zrhuSx4QrsE?si=MLtIHuYDykNS9Arg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