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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에 담긴 진심

카티아 & 마리엘르 라베크 <Encore>

by 안일구
Sony Classical, 1992
“나는 너무 계획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요. 연주는 살아 있어야 하니까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BBC 인터뷰 중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관객의 반응, 홀의 분위기, 자신이 받은 에너지에 따라 어떤 곡을 앙코르로 연주할지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고 한다. 그녀의 앙코르 연주가 더욱 귀한 이유이다. 공식 연주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면, 관객은 뜨거운 박수로 무대에 응답한다. 이어지는 커튼콜. 연주자는 무대 위를 두세 차례 오가며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연주가 시작된다. 앙코르(Encore)는 프랑스어로 ‘한 번 더’를 뜻한다. 연주자는 보통 짤막한 곡을 하나 더 연주한다. 아르헤리치처럼 즉흥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본 프로그램과 어울리는 작품일 수도 있으며, 연주자를 대표하는 음악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연주자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 이 자리에 놓인다.


짧지만 진심이 담기는 순간.

헤어지기 아쉬운 관객의 마음과, 그것에 화답하는 연주자의 마음이 만나는 시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연주이기에, 오히려 더 소중한 순간.
그것이 앙코르이다.


피아노 듀오, 라베크 자매는 '앙코르'라는 음반을 녹음했다. 두 사람이 공연장에서 즐겨 연주했던 앙코르 곡만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다. 프랑스 바스크 지방 출신인 카티아 라베크와 마리엘르 라베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피아노를 연주했다. 라베크 자매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한 뒤 본격적으로 듀오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연주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유기적이며, 두 대의 피아노가 아닌 한 사람의 연주로 보인다는 평을 많이 받는다. 특히 두 사람의 리듬 감각, 그리고 음악적 해석의 자유로움은 라베크 자매의 가장 큰 강점이다.


나는 이 음반을 주로 여행을 떠날 때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 듣는다.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라베크 자매는 공연에서 단순히 ‘좋아하는 곡을 앙코르로 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곡이 지닌 역사와 서사까지 함께 들려준다. 좋은 음악과 음악가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고 빛난다. 이 음반은 발매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 들어도 여전히 신선하고 생기가 넘친다. 먼저 베리오 부자의 음악이 눈에 띈다. 아버지 아돌포 베리오의 곡과 아들 루치아노 베리오의 작품이 음반 곳곳에 배치되어,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음악이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리를 연주자가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섬세한 선곡이다.


거슈윈과 번스타인의 곡도 흥미롭다. 이 두 작곡가는 클래식과 재즈, 브로드웨이와 심포니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음악의 정체성을 형성한 인물들이다. 라베크 자매는 이들의 음악에서 형식과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활기를 포착했고, 그것을 듀오 피아노 특유의 언어로 매혹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는 특히 거슈윈의 '강아지와 산책'이라는 곡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자주 듣게 된다.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대표적인 넘버인 'America'도 피아노 듀오 연주로 들을 수 있다. 활기찬 리듬과 선율이 기분 좋게 터져 나온다. 파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스트라빈스키의 작은 음악조각 두 개도 매력적이다. 작곡가 조플린의 섬세한 감정들이 녹아있는 '베데나'와 '엔터테이너' 연주에서도 라베크의 자매의 탁월한 감정 표현을 느껴볼 수 있다. 여기에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독일 작곡가 바흐, 슈만, 브람스의 작은 곡들은 음반 전체에 깊이를 더한다.


불과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이 앙코르 음반을 다 듣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라베크 자매는 "작은 곡이라고 해서 결코 가볍지는 않다"는 말을 우리에게 조용히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음반은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두 연주자가 가장 아끼고 즐겨 꺼내 들려주는 ‘진짜 마음’으로 가득하다. 거슈윈과 조플린, 베리오 부자, 스트라빈스키와 번스타인의 리듬까지. 짧지만 인상적인 이 곡들은 마치 무대가 끝난 뒤 라베크 자매가 관객에게 살갑게 건네는 악수처럼 느껴진다. Encore는 말 그대로 ‘한 번 더’지만, 라베크 자매는 그 안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보너스 트랙의 모음'일 줄 알았지만, 오히려 이 음반은 두 연주자의 예술관이 가장 깊이 스며든 ‘진심의 플레이리스트’이다. 듣고 나면 문득, 무대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Essential Track | 20번 트랙 (Abendlied, Op. 85, No. 12)

네 손을 위한 ‘연탄곡’은 한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그 모습만으로도 참 아름답다. 슈만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쓴 소품집 중 저녁 노래(Abendlied)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단순한 선율과 따뜻한 화성은 마치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라베크 자매는 앞선 모든 곡들을 감싸 안듯, 과장 없는 터치로 이 곡의 감성을 정제된 음으로 풀어낸다. 그들의 연주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 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문득 떠올리게 만든다.

https://youtu.be/yB1bQlsw9SE?si=0yu3DWEmAWe69LiF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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