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기엔 케라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2023>
"내 해석은 다듬어지지 않은 청년의 감각에 가까웠다."
장-기엔 케라스(Jean-Guihen Queyras)는 자신이 2007년에 녹음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 해석은 당시에도 이미 놀라웠다. 수많은 첼로 연주자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되었던 음반이기도 하다. 투명하고 생동감 넘치면서도 절제된 선율,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온기가 넘쳤다. 케라스가 말하는 그 청년의 감각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케라스는 자신이 그때 아직 바흐를 다 품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2023년, 그는 다시 바흐 앞에 섰다.
케라스는 오랫동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우리 시대에 가장 깊이 해석하는 연주자로 손꼽혀왔다. 그의 바흐는 기술적 성취를 넘어, 연주자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살려내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두 음반을 나란히 듣고 나니, 2007년의 녹음에서는 순수한 청춘의 느낌과 열정이 느껴진다면, 2023년의 녹음은 이에 더해 음들이 갖는 무게와 침묵의 깊이를 담은 듯하다. 케라스는 말한다. "이제야 나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을 이해하게 됐다." 음과 음 사이에 숨어있는 것, 소리 없는 울림까지 연주하는 것. 이것이 케라스가 바흐와 함께 힘을 합쳐 도달한 새로운 세계다.
케라스의 바흐 연주 스타일은 무엇보다 자연스럽다. 그는 악보를 절대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 악보를 하나의 지도로 삼되, 그 위를 살아 움직이는 감각으로 바꾼다. 빠른 악장에서는 리듬의 본질을, 느린 악장에서는 침묵의 깊이를 중요시한다. 보잉은 계산적이지 않고, 음의 흐름에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의 첼로는 마치 한 사람이 숨을 쉬는 것 같다. 특히 사라방드(Sarabande)나 알라망드(Allamande)처럼 느린 춤곡에서는 천천히 긴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심호흡을 연상시킨다. 그러다가 어떨 때는 시공간 사이에 길게 머물면서 시간의 흐름이 거의 멈춘 듯이 연주할 때도 있다. 바흐의 음악과 케라스의 연주가 합쳐지니, 시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고, 삶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 케라스는 전 세계 연주자들과 음악 애호가들을 위해 줌(Zoom)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워크숍을 열었다. 이 워크숍은 유튜브를 통해 진행되었지만 아주 진지하면서도 유쾌했다. 연주 기술 강의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케라스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연주자와 애호가는 바흐의 이 위대한 음악을 어떻게 대하고 연주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케라스는 자신의 연주, 생각과 설명, 다른 전문가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풀어갔다. '왜 여기에서 침묵이 필요한가?', '이 춤곡의 리듬을 느낄 때, 당신의 심장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케라스는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끊임없이 음악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연주자들은 바흐의 음악과 자신의 연주를 돌아봤고, 이는 청중에게도 바흐를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이게 했다. 우리는 케라스를 통해 깨달았다. 바흐의 음악은 과거에서 온 고전적 유산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모두의 음악이다.
2023년 바흐 녹음은 이 워크숍의 결실이고, 케라스가 걸어온 음악 여정의 자연스러운 정점이기도 하다. 케라스는 늘 바흐를 연주할 때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그 자유는 결코 제멋대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세심한 집중과 깊이 있는 경청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프레이즈 하나, 보잉 하나를 쉽게 넘기지 않는다. 그의 모든 선택은 바흐의 세계를 더 깊이 바라보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 완성된 케라스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바흐가 결코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숨 막힐 듯 진지하지만, 머지않아 따뜻한 온기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바흐가 남긴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각각 6개의 악장을 품고 있다. 우리는 음악 안에서 누구나 나만의 조각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모음곡의 몇 번째 악장이 좋았는지 굳이 나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모두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이 듣는 이마다 다르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케라스의 연주도 각자에게 다른 삶을 비추어준다.
결국 장-기엔 케라스가 다시 바흐를 연주해야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바흐는 한 번 읽고 끝낼 수 있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흐는 삶을 통과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음악이다. 케라스는 자신이 변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변화를 솔직하게, 담담하게, 그러나 가장 깊은 사랑과 경외심을 담아 바흐를 다시 마주했다. 그래서 이 음반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의 '거울'이다. 삶의 많은 부분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케라스는 우리 시대에 가장 깊게 바흐를 해석하는 연주자일 뿐 아니라, 가장 넓게, 모든 이에게 음악을 건네는 사람이다. 그의 첼로를 통해 우리는 바흐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바라볼 수 있다.
Essential Track | Cello Suite No. 5 in C Minor, BWV 1011, I. Prelude
시종일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던 케라스의 첼로는 제5번 모음곡에서 가장 깊은 음색과 울림을 낸다. 제2번 모음곡 역시 단조곡이지만, 제5번에서의 소리는 한층 더 어둡고 진하다. '프렐류드'는 전주곡이라는 뜻이지만, 이 음악은 그 이름을 넘는 본격적인 구조를 가진다. 서정적인 서주와 강렬한 푸가로 이루어진 두 부분은, 케라스 연주의 모든 미덕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음표와 음표 사이까지 연주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 프렐류드를 통해 몸소 느낄 수 있다.
https://youtu.be/Gf5yXfRe5eE?si=Jw4G1zmNlxIxvWzT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