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눔 콰르텟 <Lebensmuth>
우선 어렵게 느껴지는 팀 이름과 음반의 제목부터 살펴보자. 왜냐하면 이름에 그들의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4중주단의 이름인 지그눔(Signum)은 라틴어로 ‘표식, 기호, 사인’을 뜻하는데, 이는 네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이 하나의 뚜렷한 흔적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매 순간마다, 음표마다, 그들만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음반의 제목 <Lebensmuth> 역시 깊은 울림을 준다. ‘삶의 용기’라는 뜻이다. 이는 낭만주의의 정서를 대표하는 말로, 고난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내려는 인간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그눔 콰르텟은 이 단어를 슈베르트와 연결시켰다.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이 ‘삶의 용기’를 대변하는 것이다.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슈베르트의 희망과 그늘이 끊임 없이 교차한다. 우리의 삶도 물론 그럴 것이다.
슈베르트는 평생 동안 총 15개의 현악 4중주를 남겼다. 소년 시절 가족과 함께 연주하기 위해 쓴 초기 작품에서부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완성한 장대한 마스터피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 전체를 이 장르로 복기해볼 수도 있다. 지그눔 콰르텟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출발점과 종착점을 선택했다. 13세 소년이 쓴 1번과, 29세의 성숙한 슈베르트가 남긴 15번을 나란히 담아낸 것이다. 이들은 슈베르트의 음악적 여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음반 제목처럼 ‘삶의 용기(Lebensmuth)’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하려는 것 같다. 시작과 끝, 청춘의 맑음과 말년의 깊이가 한 무대에서 맞부딪힌다.
1번 4중주(D 18)는 슈베르트가 겨우 13살이던 시절, 가족을 위해 쓴 곡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언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방에 머물지 않고 이미 슈베르트 특유의 노래하는 선율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분명 고전주의 음악이지만, 곳곳에 '슈베르트다움'이 발견된다. 지그눔 콰르텟의 연주자들은 이 작품을 결코 습작처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작은 동기 하나에도 공을 들여 숨결을 불어넣고, 각 악기들이 서로를 향해 대화하듯 친밀한 분위기를 만든다. 덕분에 음악은 소년 슈베르트의 일기장을 엿보는듯 생생하다. 미래 거장의 씨앗이 엿보이는 따뜻한 기록이기도 하다.
반면 15번 4중주(D 887)는 압도적인 스케일과 감정의 진폭으로 슈베르트 말년의 세계를 펼쳐낸다. 50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시작부터 불안한 트레몰로와 격렬한 대비로 우리를 붙잡는다. 느린 악장은 내면을 가만히 응시하며, 마지막까지 긴장감이 이어진다. 네 사람은 이 작품에서 날것과 같은 에너지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도, 섬세한 음색 차이로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킨다. 이 곡을 들으면서 비로소 음반의 타이틀이 납득이 간다. 비극적이라기보다 끝내 삶을 껴안으려는 의지로 들린다. 음반을 마주한 우리는, 시작과 끝 모두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번 음반에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뿐 아니라 여러 소품 가곡들도 담겨 있다. 흥미로운 건 <An die Nachtigall>, <An den Mond>, <An die Musik>처럼 제목에 'an'이 붙은 곡들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독일어에서 an은 단순한 전치사가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에게 직접 말을 거는 친근함이고, 음악에서는 마음을 써서 부르는 세레나데에 가깝다. 슈베르트는 달과 나이팅게일, 그리고 음악 그 자체를 향해 편지를 쓰듯 다가간다. 이런 음악은 일상의 흔한 작은 순간이 경이로움으로 바뀌는 마법같다. 그래서 슈베르트는 들을수록 빠져든다.
<Das Weinen>, <Im Frühling>, <Lebensmuth> 같은 곡들도 같은 선상 위에 놓여있다. 눈물과 봄, 삶의 용기라는 단어를 활용해서,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감정과 희망을 음악 속에 담아낸 것이다. 이 여섯 곡을 나란히 놓고 들어보면 결국 슈베르트 음악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귀 기울이는 태도, 그리고 음악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이다. 슈베르트는 삶의 모든 순간을 음악으로 바꾸었고, 그의 음악은 그래서 슈베르트와 세상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의 진짜 매력은, 슈베르트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소품들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진다는 점이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음반으로 슈베르트의 내밀한 감정들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다. 소년의 순수함, 성숙기의 깊이, 그리고 그의 가곡에서 드러나는 친밀한 속삭임까지, 가사 없이 연주만으로 충분히 느껴진다. 지그눔 콰르텟은 이 여정을 치밀하면서도 따뜻하게 완성했다. 네 사람은 서로를 투명하게 비추며 큰 그림을 완성한다. 과장된 해석에 기대지 않고, 오직 음 안에 담긴 의미를 파헤치면서 연습한 흔적이 엿보인다. 덕분에 음반은 단순한 레퍼토리 모음이 아니라, 슈베르트라는 인간이 어떻게 음악을 통해 삶을 견디고 또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세계가 되었다. 슈베르트가 음악으로 남긴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는 결국 살아갈 희망, 그리고 살아갈 용기였을까. 이걸 듣는 우리도 음악을 통해 조금은 다시 힘을 얻게 된다.
Essential Track | 14번 트랙 (An die Musik D. 547)
이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은 바로 <An die Musik>이다. 슈베르트가 음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겉으로는 이보다 단순할 수 없을 만큼 간결하지만, 안으로는 이보다 깊을 수 없는 울림을 품고 있다. 원래 가곡이기에 성악가들이 독창회에서 자주 부르며, 피아니스트나 실내악 단체들도 앙코르곡으로 즐겨 선택한다. 극도로 소박한 선율 속에 슈베르트의 삶과 예술 전체가 응축된 이 노래를, 지그눔 콰르텟은 가사 없이 오직 악기의 목소리로 풀어낸다.
https://youtu.be/1lLkr_DcIu4?si=8Vc_W1FNOseJ701f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