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없는 레퀴엠

풀랑크 <슬픔의 성모, 테네브레의 7개 응창>

by 안일구
harmonia mundi, 2014
“강력하면서도 아름답다.”
— The Guardian

“깊은 통찰과 명료함이 돋보인다.”
— MusicWeb-International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꼽았던 음악가가 풀랑크였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접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풀랑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던게 아니었구나.' 작품 전체에 대해 당연히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고, 지금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작품과 이 음반은 평생 곁에 두고 들어야 할 걸작이다.


실제 풀랑크의 합창 작품은 그의 다른 음악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멜랑콜리와 유머가 넘치는 실내악, 경쾌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곡과 달리, 후기 합창곡에는 신앙에 대한 고백, 죽음을 향한 성찰이 있다. 이번 음반은 바로 그 또 다른 세계를 제대로 들여다 볼 기회다. 다니엘 뤼스가 지휘하는 카펠라 암스테르담, 에스토니아 필하모닉 챔버 합창단, 에스토니아 국립 교향악단, 그리고 소프라노 캐럴린 샘프슨이 이 결과물을 함께 만들었다. '슬픔의 성모(Stabat Mater)'뿐만 아니라 '테네브레의 7개 응창(Sept Répons de Ténèbres)'도 수록되어 있어 두 작품만으로도 가치가 높은 음반이다.


풀랑크의 마지막 합창곡 <테네브레의 7개 응창>(Sept Répons de Ténèbres)은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의 일곱 개의 응답”을 담고 있다. Tenebrae는 라틴어로 어둠을 뜻하는데, 단순히 빛이 없는 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세상에 드리운 어둠을 가리킨다. 또 ‘응창(Responsories)’은 단순히 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낭송에 대한 음악적 응답이라는 전례 형식을 가리킨다. 성주간의 테네브레 예식에서는 성경 구절이 낭송되고, 이어서 합창이 그 말씀에 응답하는 짧은 노래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응창’이다.


작품은 이 전통을 따라, 성경 속 수난 장면을 일곱 개의 응창으로 압축했다. 첫 번째 응창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잠든 장면, 곧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 응창은 은전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의 배신과 예수가 넘겨지는 순간에 대한 응답이다. 네 번째 응창은 예레미야 애가의 절망을, 다섯 번째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이 어두워진 사건을 노래하며, 여섯 번째는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마지막 일곱 번째는 “보라, 의인이 이렇게 죽는도다”라는 선언으로 응답을 마무리한다.


풀랑크는 이 작품을 원래 '남성 합창'과 '소년 성가대'를 위해 구상했다. 그런데 이번 음반에서는 '혼성 합창'과 '성인 소프라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흥미로운 점은 풀랑크가 악보 서문에 남긴 지침이다. “소년의 목소리는 여성의 목소리로 대체할 수 있으나, 소녀의 목소리로 대체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번 연주는 그 조건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혼성 합창의 장점을 살려 훨씬 다채로운 음향을 들려준다. 결과는 놀랍다.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응답의 노래’가 긴장과 침묵 속에서, 어둠과 빛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청자를 사로잡는다.


지휘자 뤼스의 해석은 어떤 것일까? 우선 에너지와 분위기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 외에는 불필요한 과장이 없다. 합창은 한 호흡으로 이어지고, 오케스트라는 긴장과 위안을 오가면서 다양한 음색을 들려준다. 합창단은 놀라울 만큼 정밀하다. 불어를 잘 모르지만 분명 모두가 한 사람처럼 부르고 있다. 발음은 선명하고, 리듬은 단단하다. 3, 5번 트랙에 등장하는 소프라노 샘프슨의 솔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없이 맑고 따뜻하다.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위로의 소리를 낸다. 이 작품은 종교 음악을 넘어, 모두를 위한 깊은 명상의 기회를 준다. 여러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과소평가된 걸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이 음반을 온전하게 들어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어지는 슬픔의 성모(Stabat Mater)는 여러 작곡가가 다루었지만, 이번 음반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슬픔의 성모는 “슬픔에 잠긴 성모가 십자가 아래 서 계셨네”로 시작하는 중세 라틴어 성가로, 오랫동안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준 텍스트다. 페르골레지는 바로크적 선율의 아름다움으로, 로시니는 오페라적 화려함으로, 드보르자크는 장대한 오라토리오로 각각 이 텍스트를 각양각색으로 풀어냈다. 풀랑크의 작품은 이런 계보 위에 있으면서도, 20세기 작곡가답게 간결함과 색채감을 더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각 악장은 특정 감정을 품고 있고, 지휘자 뤼스는 이를 차분하게 이끈다. 서두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합창은 부드럽게 출발해 점차 장대한 울림으로 확장되는데 절정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다. 나는 녹음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아르모니아 문디가 잡아낸 합창과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아주 탁월하다. 복잡한 성부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보석이 외부로 뿜어내는 빛은 물론, 보석 안의 물질들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 작품은 총 12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통과 애도의 노래에서 차츰 위로와 희망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악장 "내 육신이 죽을 때(Quando corpus morietur)"에서는 절망이 아닌 평온함 속에 작품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풀랑크는 이 곡을 “절망 없는 레퀴엠”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프라노 샘프슨의 역할이 이 곡에서도 빛난다. 그녀는 화려한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는다. 합창 속에서 하나의 성부처럼 스며든다. 그러나 그 존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샘프슨이 만들어내는 이 균형감은 음악의 깊이와도 연결된다. 개인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든 음악이다.


이 음반이 주는 의미는 꽤나 분명하다. 나에게는 이 음반이 풀랑크 음악을 접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다. 앞서 언급된 평단의 평가에 깊이 공감한다. 강력하면서도 아름답고, 깊은 통찰과 명료함이 살아 있다. 멜랑콜리하고 유머러스한 작곡가라 여겼던 풀랑크가 이제는 종교음악의 대가처럼 느껴진다. 이제서야 진짜 풀랑크를 만난 기분도 든다. 그래봐야 전체 러닝타임이 딱 1시간이다.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적 성취를 1시간 안에 경험할 수 있다.


Essential Track | 8번트랙(Stabat Mater: I. Stabat mater dolorosa)

솔직히 음악은 어떤 말로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직접 들어야만 알 수 있다. 슬픔의 성모는 첫 악장인 '슬픔의 성모가 서 계셨네(Stabat mater dolorosa)'부터 특별한 감정을 전해준다. 음악은 오케스트라의 짧은 서주로 시작한다. 현악기의 어두운 화음이 배경을 깔면, 곧 남성 합창이 등장해 무겁고 단단한 울림으로 슬픔의 무게를 전한다. 이어 여성 합창이 응답하듯 노래를 이어가는데, 이 목소리는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듯 부드럽다. 이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큰 울림을 만든다. 오케스트라는 그 합창을 감싸며 감정을 증폭시킨다.

https://youtu.be/9khls4jAYVg?si=Z2o5oMVo2jkXdrPc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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