뵘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칼 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슈베르트 교향곡>

by 안일구
Profil, 2019 (1979)

칼 뵘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함께 한 1979년 '굿바이콘서트'가 음반으로 남아있다. 칼 뵘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사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바그너, 슈트라우스 등 자신이 손댄 거의 모든 레퍼토리에서 압도적 해석을 남겼다. 모차르트, 베토벤 해석은 ‘교과서’라 불릴 만큼 정통성을 가졌고, 바그너나 슈트라우스 해석은 오페라와 관현악 레퍼토리에 새로운 영혼를 불어넣었다. 칼 뵘 특유의 음악은 엄격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닌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함 속에서도 드라마틱한 긴장이 함께 만들어진다. 그의 지휘 아래 울려 퍼진 사운드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최고의 기록으로 기억된다.


한편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단원들은 그의 압도적인 성격과 날카로운 기세에 늘 긴장했다. 연습 중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케스트라 단원을 향해 “당신, 집에 가라!”라고 호통을 치거나, 단 한 번의 실수에도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때때로 그는 자신만의 다소 권위적인 발언으로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덕에 단원들은 음악 외적인 공포심까지 안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지금 시선에선 다소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전형적인 마에스트로의 모습이었다.


사실 예전 음반을 자주 듣는 편은 아니다. 지금 세대의 연주자들이 가진 감각과 표현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녹음 기술의 한계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칼 뵘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남긴 이 마지막 녹음은 여러 번 찾아 듣게 된다. 음질의 아쉬움 속에서도 전해지는 생생한 현장의 숨결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뵘이 직접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곡을 소개하고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실제 목소리 트랙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마치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뵘 할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만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그의 슈베르트는 압도적이다.


교향곡 5번은 모차르트를 떠오르게 하는 선율미와 젊은 활력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뵘의 해석은 의외로 맑고 경쾌하다. 곡이 가진 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이 시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색들이 많다. 드레스덴의 목관악기가 빚어내는 고풍스럽고 따스한 음색은 밝은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다. 현악기의 정확하고 깊은 음색도 대단하다. 부드러운 레가토 연주는 이때도 여전하다. 음악의 흐름은 명료하고 긴장과 완화가 섬세하게 조율되어있다. 슈베르트가 젊은 시절에 품었던 생기와 이상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교향곡 8번 ‘미완성’에서도 뵘의 해석은 빛을 발한다. 그는 곡의 아름다움과 비극적인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부풀리기보다는 고요한 긴장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게 한다. 특히 1악장을 여는 네 음의 도입부가 대단히 매력적이다. 완전한 고요 속에서 저음 현악기, 오보에, 호른이 차례로 등장하고 이내 전체 악기가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뵘은 음악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여백 속에 던져놓는다. 그 안에서 슈베르트 인생의 고통과 행복이 모두 선명하게 드러난다. 깃털같은 가벼움도 장대한 큰그림도 칼 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운드가 들려온다. 미완의 운명을 품은 교향곡은 칼 뵘의 해석으로 온전하게 완성되어 있다.



결국 드레스덴 사운드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교향곡 9번에서 뵘의 지휘를 들어봐야 한다. 이 곡에 ‘그레이트’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뵘은 이 곡을 진짜 스케일이 크게,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한 번에 전체를 묶어버린다. 지금 기준에서는 다소 느린 템포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여유있는 템포 덕분에 곡 전체가 웅장하면서도 각 파트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금관의 묵직한 울림, 현악의 촘촘한 결, 목관의 부드러운 선율이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클래식한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 곡에서 뵘은 그냥 지휘자가 아니라, 전통을 꿰고 있는 해석가이자, 미래에 존재할 후배들에게 음악을 전달해주는 가이드이다.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일종의 성지순례 같은 연주랄까?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 같은 올드 악기들이 지금도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단순히 악기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 시대의 나무, 그 시절의 제작 방식, 그리고 시간이 만든 소리까지. 모든 것이 지금은 다시 만들 수 없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다. 그때만 존재할 수 있었던 인물, 그 시대에만 가능한 소리. 이 음반은 바로 그런 순간을 담고 있다.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냈는지, 아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마치 뵘 할아버지가 조용히 옆에 앉아, “우리 시대는 이런 시대였단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 전통은, 지금의 지휘자들과 오케스트라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Essential Track | 12번 트랙 (Karl Böhm Says Farewell)

칼 뵘 드레스덴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던진 메세지는 명확했다. 바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켜잘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이 오케스트라를 지켜주십시오. 이 오케스트라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저는 이들을 지휘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지휘자가 없이 혼자였던 시기에도. 그들은 자기 절제를 통해 진정으로 그 수준을 유지했고, 지휘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을 느끼고, 또 느끼고, 또 느낍니다. 보십시오, 저는 이제 나이 들어서 음악 속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더 경험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오직 그것이 저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고, 또 청중에게도 기쁨을 준다는 수많은 증거를 받기 때문에 지휘를 계속합니다. 그것이 제 지휘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제 슈타츠카펠레를 잘 돌봐주십시오."

https://youtu.be/YLcjZWKTlko?si=6aaqBcTGMFhp3QNC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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