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The Handel Project>
“헨델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서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을 것이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이 남긴 이 말은 헨델의 음악에 대해 후대 작곡가들의 존경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은 꾸준히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고, 바흐와 함께 18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힌다. 바흐는 대위법의 정밀함과 종교적인 깊이를 음악사에 새겨 넣었고, 헨델은 이야기와 인간감정을 다루는 데 탁월했다.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기악곡에 이르기까지 헨델의 음악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달성했다. 선율은 단순하면서도 고,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직관성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헨델을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메시아>의 “할렐루야 합창”, <리날도> 아리아 “울게 하소서”, <세르세>의 "옴 브라 마이 푸"까지. 헨델의 음악은 시대를 넘어선 보편성을 담고 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10년여간 조성진은 시대를 넘나들며 각양각색의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그 수많은 여정 가운데서도 가장 의외의 선택은 헨델이었다. 바흐도 아닌 헨델이라니. 그런데 지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애정하는 음반이다. 선물 같은 ‘1시간의 헨델’이다. 조성진이 헨델을 선택한 이유를 시대의 확장이나 근본적인 음악의 탐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음반을 듣다 보니 그냥 '좋아서'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좋은 음악이 있으니 한 번 들어보세요." 하는 것 같다. 그게 맞다면 정말 성공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헨델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이제 생활 속에서 이 음반을 꺼내어 듣는다.
헨델이 런던에 정착한 것은 1710년대 초반, 하노버 궁정 악장을 지낸 뒤였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더 큰 무대와 청중을 원했고, 결국 당시 음악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런던으로 향했다.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 모음곡은 그가 건반 연주자로서도 자신의 위상을 세우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바흐의 모음곡이 학구적이고, 종교적 색채를 띠는 반면, 헨델의 모음곡은 무대 경험에서 비롯된 직관적 선율과 극적인 감정 폭을 담아낸다. 조성진이 연주한 2번, 5번, 8번 모음곡은 바로 이 런던 초창기 헨델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쓰인 모음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 연주자는 생각이 많아진다. 얼마나 드러낼 것인가, 어떤 음색을 낼 것인가, 어떤 템포를 선택해야 할까. 이 음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 절제와 투명성이다. 페달을 배제한 선택은, 가볍게 연주해도 음 하나하나의 명료함을 살려준다. 장식음과 트릴은 정교하게 처리되어, 세밀한 무늬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계속 음악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조성진 특유의 노래하는 프레이징 덕분이다. 느린 악장에서는 숨 고르듯 여백과 호흡을 살리고, 빠른 악장에서는 강하지 않으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맑음'과 '서정'이 함께 깃든 헨델이다. 건반 위에서 시종일관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음반에는 헨델의 모음곡 2번, 8번, 5번과 더불어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1861)가 함께 담겼다. 이 곡은 브람스의 20대 중반 시절에 쓰인 작품이다. 베토벤의 후계자라 불리던 브람스는 옛 거장들을 누구보다 존경했으며, 특히 헨델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선율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브람스는 헨델 모음곡 3번에 실린 아리아 선율을 바탕으로 25개의 변주와 웅장한 푸가를 쌓아 올렸다. 가볍고 우아한 바로크 선율이었지만, 브람스의 손에서 낭만주의 건축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곡에서 브람스는 다양한 변주 기법을 활용하는 한편, 헨델이 열어놓은 선율의 보편성을 19세기 언어로 확장해내고 있다.
이 음반은 헨델의 건반 모음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넘어, 헨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헨델의 선율은 국경과 세기를 넘어 누구에게나 울림을 준다. 게다가 오늘날 피아니스트가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곡은 전혀 다른 빛깔을 띤다. 조성진은 자신만의 직관으로 이 곡을 새롭게 마주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명료하고 섬세하다. 그 안에는 언제나 노래하는 목소리가 살아 있다. 이 균형감이 오늘날 청중이 그의 해석에 매혹되는 이유다. 브람스의 푸가가 끝날 때 우리는 헨델의 선율이 시대를 건너 브람스를 거쳐, 다시 젊은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더. 연주의 본질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음악이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시종일관 건반 위에서 바람이 분다.
Essential Track | 42번 트랙 (Handel: Suite in B-Flat Major, HWV 434: IV. Minuet (Arr. Kempff for Piano)
소박한데,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HWV 434 모음곡의 마지막 악장인 미뉴엣(Minuet)은 헨델의 건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선율 가운데 하나다. 빌헬름 켐프가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이후, 완전한 피아노 곡처럼 느껴진다. 특히 조성진의 연주는 구절이 반복될 때마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음색을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바로크 시대의 우아함과 현대 피아노의 서정성이 아름답게 빛난다. 이 짧은 미뉴엣 안에서 헨델의 음악이 지닌 보편성과 매혹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 있다.
https://youtu.be/OFH38_lZjz0?si=pERdh8fcFOEe9-zw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