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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9. 2018

명동에는 시대정신이 있다

40년 전, 그리고 지금도


40년 전이다. 통 큰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두른 장발의 청춘들이 자유를 노래하던 시절 말이다. 명동은 당시에도 번화했다. 이름만큼이나 밝고 활기찬 이곳은 문화를 선도했고 시대정신의 집합소였다. 그래서일까. 명동에서만큼은 낮과 밤을 나눌 이유도 없었다. 쨍쨍한 햇빛을 조명삼아 멋쟁이들은 패션의 유행을 선도했다. 청년들은 은은한 달빛을 안주삼아 옹기종기 음악다방에 모여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그야말로 1970년대 명동은 화려한 구심점이었다. 더불어 유신이라는 탄압 속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을 꽃피웠다.  


그렇게 명동은 시대가 자행하는 검열을 비웃으며 반항을 품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구국선언문이 낭독됐다.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오랜 구국정신이 깃든 장소에서 말이다. 1898년 건립된 이래 명동성당은 늘 저항정신을 대변했다. 친일파 이완용을 단죄하고자  칼을 휘둘렀던 이재명 열사의 의거부터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명동성당은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정의로운 역사를 켜켜이 쌓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명동성당은 이제 민주적인 상징을 벗어나 우리의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많은 이들이 백년가약을 맺고 종교의 장벽을 허물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제 명동성당은 진한 세월을 머금은 채 평범한 행복을 위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부덕한 시대에 저항했던 청년문화 역시 1970년대 명동을 상징한다. 다방의 LP판에서 흘러나오는 포크송을 위로삼아 청춘들은 일상에 부재하는 낭만을 노래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대의 풍속이 그려졌고 성역 없는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음악다방 돌체는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모여 시대정신을 토론하고 비판하는 아고라의 역할을 수행했다. 샤넬 다방은 여성 퀴어 문화를 선도했다. 당대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파격 그 자체였다. 이밖에도 PJ, 쉘부르, 나폴레옹 등 다양한 문화 공간들이 선도적인 명동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여기서 음악인들은 부당한 시대가 주는 영감을 먹고 성장했다. 이윽고 장발의 청춘들은 한데 모여 울분을 머금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향유했다. 


그렇게 음악이 흐르는 명동 거리 속 다방은 수많은 젊음이 회자되는 사랑방이었다.


지금의 명동이 보여주는 청춘상은 어떨까. 화려한 네온사인이 수놓은 명동 거리 위에는 K-POP이 흘러나오고 한류 열풍이 가득하다. 인기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품을 사기 위한 외국인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외국어 홍보 역시 상당하다. 오죽하면 명동이 한국 속 외국이라는 별칭을 얻었을까 싶다. 이런 가운데 여전히 명동은 패션과 쇼핑의 메카이다. 복합의류쇼핑몰이 즐비하고 젊은 멋쟁이들은 여전히 화려하게 명동을 활보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신세대의 음식들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식문화를 제시했다. 날마다 새로운 볼거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렇게 명동은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시대를 노래하던 명동의 청춘은 이제 세계를 향해 노래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바라본 명동은 한국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무거운 시선만이 명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고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명동은 아늑한 안식을 제공했다.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으로 명칭이 바뀐 명동 국립극장은 1975년 문을 닫기 이전까지 다채로운 연극과 유명가수들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다. 이처럼 전국적인 문화의 유행은 바로 명동에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먹거리도 마찬가지다. 70년대 명동은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국밥과 답답한 속을 뚫어주는 매콤한 낙지볶음과 같은 음식들로 가득했다. 프랜차이즈가 전무했던 시절 넉넉한 인심과 손맛으로 승부했던 명동의 음식점들은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줬다. 그리고 지금, 거대상권에 잠식된 빌딩숲 사이 골목에 40년 전의 향수를 고스란히 간직한 음식점들이 남아있다. 사람들은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낡은 간판과 빛바랜 벽지를 찾는다. 추억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들로 인해 40년 전을 데웠던 음식은 여전히 뜨겁다.

      

명동의 시간은 멈춘 적이 없다. 늘 변화하며 그 시대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명동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격동의 시기였던 1970년대에 모든 시대정신은 이 안에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새로운 문화양식도 번성했다. 그렇게 진일보했던 이곳은 현재 대한민국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명동은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선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을 조명한다. 형태는 변하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명동이라는 공간에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명동은 한 시대의 정신으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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