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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0. 2018

지나간 마지막에는 한 줌 미소를 남겼다

떠난 인연을 기억하는 방법

많은 인연을 마주쳤다. 관계가 빚는 형태도 다양했다. 느슨한 듯 질기기도 했으며 강렬하게 다가와 쉬이 식어버리기도 했다. 간혹 누군가는 차갑게 돌아서서 사라졌다. 당연히 옆에 있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이따금씩 끝나버린 관계를 생각해본다. 그들과 나눈 마지막을 떠올렸다. 관심과 애정이 사라진 얼굴은 건조했다. 물론 화를 내진 않았다. 사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는 만남에 표정을 내비치는 노력조차 사치였을 테다. 그저 무표정한 인사와 단호한 뒷모습이 전부였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마지막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잘 잊지 못한다. 사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저 잊으려고 애쓰면 마치 지난 세월을 함께 채운 내 모습마저 지우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차갑게 남기고 싶지도 않다. 함께 뜨거웠던 좋은 시절도 있었으니 적당히 미지근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무언가가 필요했다. 식어버린 기억을 데울 수 있는 온기가 절실했다. 골몰하던 끝에 난 미소를 떠올렸다. 그 언젠가 함께 거리를 거닐다 밝은 햇살에 환히 빛났을 미소. 오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바랜 행복이 보였다. 꾸역꾸역 세월 속으로 욱여넣었던 행복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나는 그 주름 사이를 헤집었다. 이윽고 작은 미소들이 떠올랐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유하는 기억 하나를 붙잡았다.

     

20대에 들어서 처음 사랑했던 그녀는 유달리 웃음이 많았다. 작은 즐거움에도 그녀의 큰 이목구비는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때면 나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놀이공원에 놀러 가면 그녀는 언제나 도시락을 손수 준비했다. 기대감을 안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방울토마토가 수놓은 스마일 모양이 있었다. 맛도 물론 좋았지만 함박웃음을 담은 도시락에 가슴이 몽글거렸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밝은 미소가 있었다. 나는 잘 웃는 그녀가 좋았다. 함께 있으면 모든 슬픔이 무색해졌다. 이런 순간이 영원할 거라는 낭만도 있었다.

     

하지만 곧 우리는 이별했다. 각자가 하고픈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소홀한 관계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참 어린 나이였다. 견디는 법을 잘 몰랐다. 아득한 미래에 지레 겁을 먹었다. 끝내 우린 자주 추억을 새겼던 혜화에서 헤어졌다. 생동하는 봄기운이 넘실대던 그 날, 우리는 웃지 않았다. 아름다운 이별이 없다는 건 진작 알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옅은 미소로나마 갈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휑한 마음을 감추려 멋쩍게 악수를 건넸다. 살며시 맞닿은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낯선 느낌에 재빨리 손을 거뒀다. 이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 표정 없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을 실감했다.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마주친 건 4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붐비는 2호선에 몸을 싣고 가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이윽고 지하철은 이대역에 다다랐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양쪽에서 부대꼈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기지개를 켰다.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바삐 뛰어와 내 옆에 앉았다. 아슬아슬한 마음에 옆을 돌아봤다. 그녀였다. 놀란 나머지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짤막한 정적을 깨고 난 잘 지내냐는 진부한 안부를 물었다. 새내기였던 그녀는 슬슬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운 사랑도 만난 듯했다. 표정은 한결 편해보였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한층 성장한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중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그냥 뒷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나도 답례로 밝은 미소를 건넸다. 다시 우리 사이에 마지막이 찾아왔다. 표정이 없었던 마지막에는 새로운 미소가 새겨졌다.

      

내겐 새롭게 기억할 그녀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에 미소를 남겼다. 다시, 무수히 지나간 인연들이 찾아왔다. 제각기 다른 순간에 다른 미소를 숨긴 채 말이다. 나는 그 순간을 남길 작정이다. 한때라도 아름다웠노라 말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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