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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5. 2018

우리는 마흔이 되면 죽는다

이토록 젊은 날에

4년 전이었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뉴스에서는 연신 그가 살아온 삶을 조명했다. 거리에는 종일 민물장어의 꿈이 울려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그를 먹먹한 마음으로 되뇌었다. 나도 그를 되새겼다. 그는 호불호가 명확했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그러했다. 직선적인 성격과 입담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생동하는 정신이었다. 물론 그는 이런 시선에 구애받지 않았다. 제 뜻대로 뚜렷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직하게 존재감을 나타낼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비보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 육신에 깃든 시대와 정신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짙은 슬픔이었다.


신해철을 정말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한 줌 재로 돌아가는 삶에 허무함만 잔뜩이라며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비워지는 술잔에는 셀 수 없는 우울함만 가득했다. 우리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적막을 갈음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뜸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모두 40살이 되면 죽을 거야.


새벽달에 선언한 시한부였다. 형체 없는 슬픔이 죽음을 불러왔다. 죽는다는 말에 절로 눈이 커졌다. 파릇파릇한 청춘에게서 식어가는 의지만 선명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연신 이 말을 되풀이했다. 눈물을 머금은 얼굴은 허탈한 아픔을 부여잡고 있었다. 같은 말이 반복되자 이내 죽음은 흐려졌다. 나는 그런 소리 말라는 위로로 우울한 분위기를 메웠다. 그렇게 갑작스레 드리운 죽음이 걷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명한 단어가 있었다. 마흔. 그녀는 젊은 세월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삶이 끝나기에는 마흔은 너무나도 이른 나이다. 나는 다시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마흔 언저리에서 꽃을 채 다 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이에 대한 애도였을까. 아니면 무망한 삶에게 외치는 처절한 절규였을까. 물론 술김에 내뱉은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호하고도 무기력한 선언은 의외로 깊은 여운을 남겼다.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실 마흔에 죽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 나이가 머리를 스칠 때면 떳떳한 가장으로 자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살아온 날보다 적은 남은 날을 세어가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는 이른 죽음을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유도 다양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이도 있었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사라지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이쯤 되니 조금 이상했다. 그 누구도 죽고 싶어서 죽음을 원한다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오직 이상적인 죽음을 꿈꾸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마지막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막연한 슬픔이 밀려왔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다시 나는 마흔을 떠올렸다.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보편적이고 평범한 마흔은 이렇다. 가장이 되어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는 나이. 우선순위에 나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놓게 되는 나이. 내 이름 석 자 대신 누구 아빠 혹은 누구 엄마로 불리는 나이. 작은 일탈마저 주책으로 불리는 나이. 맞다. 마흔은 그간 나로 살아온 삶에 종언을 고하는 시기였다. 물론 우리 모두 그 나름에도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밀려오는 서글픔을 막아낼 재간은 없다. 많은 이들은 그저 무뎌지게끔 버티며 살아간다. 흔히 마흔은 불혹이라고도 일컫는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나는 감히 이 말에 반대한다. 어찌 유혹이 없겠는가. 젊은 시절 미처 끄고 오지 못한 열정도 수두룩할 테다. 그러나 수많은 불혹들은 정제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위해.


신해철은 47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젊은 나이에도 그랬지만 40대로 살아왔던 7년도 그에게는 영원한 청춘이었다. 자유가 깃든 철학을 노래하며 혼탁한 시대에 일갈하는 모습이 아직도 그를 대변한다. 그는 삶의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던 영혼이었다. 그래서 삶에 지쳐 많은 꿈을 포기하고 사는 이들에게 신해철은 선망하고픈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에 친구가 읊조리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마흔이 되면 모두 죽는다는 말.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자유롭게 유혹될 수 없는 순간부터 죽은 거나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그랬다. 슬픈 자화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청춘들은 기어이 죽음을 입에 올렸던 것이다.


요즘도 그녀를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농담처럼 꺼낸다. 그녀는 헛소리였다며 질색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해 가을이 던져준 죽음에 감사한다. 아무렇지 않게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나를 잡게끔 해줬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기꺼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어졌다. 많은 이유들이 쌓이면 마흔은 더 이상 죽음과 가까워지지 않을 테다. 그렇게 되길 바라며 지금도 나는 내게 남은 날을 더 세어보고 있다.


설령 마흔이 되어 지난 나를 묻을지언정 다시 태어나는 나를 반길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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