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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5. 2018

무의미라는 지독한 오해

방뇨보다도 더욱 하찮은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한다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회의 때마다 늙은 칼리닌은 오줌을 참았다. 심할 때는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터질 듯한 방광을 보며 연민을 느꼈다. 사실 칼리닌은 참은 것이 아니라 참아야만 했다. 스탈린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회의를 끝내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늙은 동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고대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야망에 짓눌려 있던 의식이 잠시나마 허무맹랑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스탈린은 무거운 의미를 내려놓기 위해 무의미를 찾았다. 그리고 동지를 향해 숭고한 오줌을 기리는 위대한 오해를 선물했다. 너무 하찮아서 실제로 있었을 법하지만 위 일화는 모두 상상이다. 위대한 허무를 그려내기 위해 밀란 쿤데라는 공산권 역사에 짓궂은 장난을 쳤다. 저서 이름조차 <무의미의 축제>다. 하찮은 것이 예찬받기 위해선 오해가 필요했다.


그리고 쿤데라에게 그 오해는 누군가가 짊어질 수치였다.


보통 오해는 의도되지 않는다. 생각이 진실이라는 균열을 만나 우연한 순간에 형성하는 부산물일 뿐이다. 이런 오해들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산화된다. 하지만 쿤데라는 철저히 의도한 오해를 던졌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오해. 촘촘하게 조각된 오해는 꽤나 질기다. 관계 사이를 부유하며 그럴싸한 감각들을 흡수한 오해는 종국에 본질마저 잠식할 정도로 커진다. 스탈린과 칼리닌도 마찬가지다. 만약 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공산주의를 지탱했던 인물들은 오해가 빚은 하찮은 농담 사이에서 부식됐을 테다.


물론 쿤데라는 농담으로부터 조명되는 무의미라는 가치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달리 해보자. 그가 무의미를 위해 깔아놓은 오해, 다시 말해 즉각적인 본능을 치열한 숭고함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은 오히려 칼리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는 한때 명목상으로나마 국가 원수였다. 그러나 쿤데라가 설계한 세계 속에서 그는 압제적인 권력 아래서 방뇨하기에 급급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바로 사람들이 그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사실과 거짓을 즉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다행히 여기엔 가상이라는 주석이 달린다. 쿤데라는 상상이란 이름으로 칼리닌이란 역사를 보호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이 주석이 있어야만 온전한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의도적으로 설치된 오해가 불러온 결과다.


의도한 오해는 이해를 수반하지 않는다. 스스로 타자 혹은 상황을 마음대로 규정할 따름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결단은 누군가가 짊어지고 있는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한다. 그 의도가 선의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나타나는 양상은 비슷하다. 결국은 독단적인 판단이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정립되어야 관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밑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책임에 대한 몫이 규정되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오해한 자들은 스스로에 대해서만 수정을 시도하면 된다. 하지만 오해받은 자들은 해명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전면전에 나서야 한다. 원치 않았던 인식에 대해 불필요한 불쾌감을 내색할 필요도 생긴다. 타인이 내비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한 대가는 실로 크다.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생각이 어느새 누군가를 다른 주체로 조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면 됐다는 말로 갈음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오해들이 현대 사회 위로 솟구치고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에 대한 오해는 그다지 무의미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원하는 바를 체현 혹은 감상하고자 무심코 타자에게 억지스러운 옷을 입히기도 한다. 그 암묵적인 압제 속에서 수많은 칼리닌들은 오늘도 오줌을 참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계라는 이름 아래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단어 하나로 등치될 만큼 누군가가 살아가는 오늘이 가볍지도 않다. 혹시 우리도 무의미한 오해를 남발하며 누군가를 지독하게 옭아매고 있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쿤데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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