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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9. 2018

카스테라와 데카당스

박민규의 <카스테라>가 말하는 21세기형 데카당스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다. ···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그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위대한 역사를 고작 맥주나 김치 따위로 축내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지독한 소음을 내뿜는 낡은 냉장고라도 본질만큼은 꿋꿋하게 숭고하지 않은가. 결국 그는 냉장고 안에 무궁무진한 세계를 담기로 한다. <걸리버 여행기>부터 미국과 중국까지. 이윽고 냉장고에는 카스테라만 남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카스테라. 한낱 밀가루 덩어리로 압축된 세계를 베어 물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엔 형언할 수 없는 희로애락이 담겼으리라.


박민규는 비루한 세계에서 카스테라를 바라봤다. 아마도 메마르고 찢어진 질서가 부드럽게 융화되길 바랐을 테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이 뒤엉켜 탄생한 카스테라는 그저 달콤하고 맛있었다. 새로운 시대에서 바라본 과거가 마냥 조악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세상에 지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탓일까.


사실 이 기상천외한 상상엔 회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하다. 자연이라는 질서는 역행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장고는 그 역행을 가능케 했다. 썩어 문드러질 예정이었던 것들은 신선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골방에 사는 한 청년에겐 거대한 세계를 담을 용기가 생겼다. 그 세계는 둘 중 하나였다. 소중하거나 해롭거나.


그렇게 작은 냉장고는 보존과 소멸이 동시에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박민규는 흘러간 구시대에 대한 회한을 온기를 머금은 카스테라 사이로 집어넣었다. 다음 세기에 찾아올 오래된 인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겠다는 다짐도 새겼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리적 질서에 훼방을 놓으면서까지 잡고 싶었을 절망적인 희망이다. 작가는 이 역설적인 단어를 열심히도 반죽했을 테다. 결국 그가 카스테라로 일축한 물질적 일체감은 이룩할 수 없기에 상상으로나마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때로 얼룩진 세상에서 한없이 염세적이니 말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질서를 해체하는 당돌한 전위예술이 상상의 나래에 종지부를 찍을 즈음 나는 데카당스를 떠올렸다.


데카당스(Décadence). 달리 말하면 퇴폐주의 문학이다. 이 문예사조는 전위적인 시선으로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기괴한 설정을 통해 새로운 미적 감각을 탐닉한다. 저 유명한 보들레르도 그러했고 랭보도 그러했다. 비관과 낙관으로 버무려진 상상이 현실보다 더 큰 감각을 부여할 때 데카당스는 비로소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박민규는 카스테라로 21세기형 데카당스를 창조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 20세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


박민규에게 20세기는 모든 것을 냉장한 시대였다.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음식을 냉장하기도 했지만 부패한 것들마저 냉장했다. 냉장된 해악이 건재한 시대를 그는 촉촉한 온기로 마무리했다. 그에겐 폐단으로 불리는 관습과 질서에 대한 저항이 따뜻한 카스테라를 건네는 것이었다. 다정하면서도 허무한 선택이다. 심지어 카스테라라는 이미지가 주는 부드러움이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극단적인 인과관계를 조성했다. 그 인과관계는 불안정한 질서 위에서 요동치며 이질적인 요소들로 하여금 불편한 동질화를 경험케 한다. 이윽고 불편한 감각은 카스테라라는 이미지로 치환된다.


역설적인 탐미주의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소설을 읽은 이들은 암울한 현실을 위트로 표현한 박민규식 문학적 재기에 감탄한다. 하지만 정말 감탄할 만한 것은 그가 정반대로 감각적 전이를 일으켜 원관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랄한 풍자를 해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조적 질서는 파괴됐고 세계를 지탱하는 상식도 무너졌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끝내 카스테라만 남은 냉장고는 여전했고 그걸 바라보는 이가 살아가는 세상도 여전했다. 눈물과 연민을 머금은 것 외에 바뀐 것은 없었다. 그저 차가운 냉장고에 따뜻한 빵이 있다는 비상식적인 현상만이 외로이 남았을 따름이다.


무수한 상상을 통해 나아진 세상을 위한 저항과 일탈을 일삼지만 끝내 변하지 않은 현실을 목도하는 것. 데카당스를 통한 수많은 역사적 시도가 맞닥뜨렸던 현상이다. 절망적인 희망을 바라보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있을까. 그 괴로움을 달콤함으로 갈음한 박민규는 또 얼마나 호기로운가. 똑같지는 않겠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을 이렇게 다정하게 건넬 수 있다니 진정 놀라운 재능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비관과 염세를 말할 수 있는 그이기에 감히 <카스테라>를 21세기형 데카당스의 현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산이 변할 동안 이 소설은 또 어떤 세상을 냉장하고 있었을까. 다시 책을 펼쳐보고 싶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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