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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28. 2018

새벽, 낙엽, 가로등

요즘은 부쩍 새벽녘과 친해졌다. 거리에는 어둠을 한 움큼 삼킨 가로등이 길게 늘어섰다. 길바닥에는 따스하게 물든 낙엽들이 제멋대로였다. 나는 발 아래 놓인 가을을 살포시 즈려밟았다. 이내 침묵하던 공기가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나는 한 연인을 마주쳤다. 하필 떨리는 입술을 포개던 순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음마다 메마른 낙엽이 밟혔다. 부질없는 외면이었다. 농밀하게 무르익은 연인의 시간은 이미 깨져버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저 사랑은 머지않아 다시 어느 새벽길을 데우리라 생각했다. 그 순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마음들을 헤아려 보니 괜히 애틋했다. 붉게 물들기 위해 더운 시간을 인내했을 무수한 낙엽들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나는 그 새벽에 마주한 사랑이 입가에 만연한 미소마냥 영원히 환하길 기원했다.


잠깐. 영원히라니. 내가 믿지 않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내겐 오랜 믿음이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건 없다. 오로지 영원하길 바라는 사랑만 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건 끝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모험이다. 삶이 유한하니 별 수도 없다. 별 수가 없으니 우리는 기어이 누군가를 마음에 새기고 좋아한다. 맞다. 구태여 예정된 비극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끝이 보이는 시작을 하는 존재.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사랑이다. 미워하기 위해서 좋아하고 지치기 위해 좋아하는 일. 우리는 이 모순덩어리를 갈망하며 산다.


사랑했던 누군가와 살을 문대며 입을 맞췄던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모진 날들에 바래질 법도 하건만 짜릿하게 혀 끝을 맴도는 감촉은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그녀에게 많은 말을 건네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 행복하다는 말, 내일이 기다려진다는 말. 감정은 버거울 정도로 부풀었다. 입 안을 가득 메운 말들을 전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에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아로새기기로 다짐하며.


그러나 애석하게도 열렬한 입술 위엔 다짐만 있었다.

두 개의 입이 실어나른 말들은 끝내 읽히지 못했다. 그저 무겁게 쌓여 요동치는 마음을 짓눌렀을 뿐이다. 불안이 엄습했다. 이 사랑의 숨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숨이 다하지 않도록 난 있는 힘껏 입술을 갖다댔다. 하고픈 말을 실을 여력조차 없었다. 어느새 입맞춤은 가벼워졌다. 은은하게 포개졌던 얼굴에는 의무감만이 만연했다. 이 관계가 끝나는 순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모든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에게 죄인인 것을. 불안은 생각보다 얕고 하찮았다. 이토록 가벼운 감정은 우리 첫 키스가 품었던 생기를 앗아갔다.


그리고 무르익었다 여겼던 사랑은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감히 한 뼘 남짓한 입술 위에 싣고자 했던 말을 끝내 읽어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함께 숨 쉬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빨갛고 노오란 낙엽더미가 두 발에 치였다. 어느 여름날을 열심히 빛내고 떨어져 정처없이 나뒹구는 모습이 처연했다. 아니. 아니다. 처연할 이유가 없다. 낙엽은 지는 것이 숙명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사랑도 똑같다고 믿는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져버렸을 뿐이다. 생이 다할 때까지 사랑해도 영원한 사랑은 아니다. 그저 영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연들이 맺은 종지부다. 어쨌든 모든 사랑은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무던한 마음에 나른해질 즈음 가로등을 바라봤다. 불빛은 유난히 밝았다. 덕분에 낙엽들은 낮보다 더욱 선명했다. 문득 황급하게 입술을 떼던 연인이 떠올랐다. 가로등은 그 사랑과 지난 사랑을 머금은 낙엽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거리가 기억할 사랑들이 함께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비록 황망하게 떨어졌어도 어둠 속에서조차 빛날 수 있다니 . 사랑하는 순간은 사라졌어도 사랑했던 순간은 그렇게나마 맑은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사랑했던 이가 될 것이다. 식지 않을 빛을 품은 채로.


언젠가 사랑했던 그녀는 메마른 내게 물을 주고 싶다며 시집을 한 권 건넸다. 하지만 끝내 우리 사랑은 메말랐다. 아마 지금은 붉게 물든 채로 이름 모를 거리를 나뒹굴고 있을 테다. 그래도 이 말은 꼭 전해주고 싶다. 어느 낯선 새벽에 드리운 가로등 빛 아래서 참으로 열심이었던 우리 사랑을 찾았노라고. 그래서 개의치는 않되 잊진 말자고 말이다. 사랑을 피어낸 그 시절 우리는 아무래도 소중하고 아름다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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