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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30. 2018

다시, 그림자를 만났다

황정은 <백의 그림자>

무재와 은교는 숲을 거닌다. 그림자가 눈에 아른거린다. 무재는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 속삭인다. 일어서는 그림자를 주시하고 경계해야 한단다. 은교는 발아래 놓인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리곤 생각에 잠긴다.


선과 악. 그림자는 둘 중에 무엇일까.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담백하면서도 덤덤하다. 간결한 문체에는 적적한 고요함이 묻어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전자상가를 살아간다. 촉박한 일상은 하염없이 퀴퀴한 공방을 훑고 지나간다. 그들에겐 모두 그림자가 있다. 틈만 보이면 기지개를 켜는 그림자. 여 씨 아저씨도 안다. 그림자는 결코 달갑게 여길 수 없다는 걸. 그저 상가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그림자가 무색해지길 바란다. 이런 경계심을 품으면서 말이다.


이빨을 드러내는 그림자는 좌우지간 조심해야 해.


바깥 세상도 적잖이 혼란스럽다. 철거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감당할 수 없는 그림자 더미를 얹기 시작한다. 가동에서 마동에 이르기까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무수한 삶이 사라진다. 그렇게 생경한 폭력은 그림자로 둔갑해 가늘고 미약한 숨통을 죄어온다. 숱한 세월을 지켜온 여 씨 아저씨와 오무사 노인도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난다. 허무한 소멸의 공기가 팽배해질 즈음, 무재와 은교는 본질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윽고 등장하는 마뜨로슈까는 다음과 같은 단상(斷想)을 끌어온다.


마뜨로슈까는요,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로슈까 속에 마뜨로슈까가 있고 마뜨로슈까 속에 다시 마뜨로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로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로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공허한 이야기. 그러게 말이다. 원래 인생은 공허했다. 그림자 때문에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그 마뜩잖은 존재가 일어선다한들 개의치 않아도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볼까. 애당초 공간도 중요치 않았다. 누군가 슬럼이라 말하며 개발을 주장하는 이곳이 곧 삶이었으니. 고단한 일상을 체득한 자들에겐 그림자는 익숙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넘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림자가 일어서서 나를 눕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들은 그림자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을 잉태한 자들이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을 먹고 더욱 자라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습하고 육중한 공기가 느껴지는 이유다.


황정은은 이 절박한 난국을 담대하게 마주한다. 인생이 별 거 아니라지만 모든 삶에는 엄연히 자생력이 있다. 스스로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질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소설은 불행한 공기를 나지막한 발화로 정화한다. 그녀는 상가 속 인물들이 생동하며 일궈내는 조용한 저항을 조명한다. 삶에 무수한 그림자가 드리워질지언정 이들은 고요한 대화 속에서 날카롭게 저항한다. 혹자의 말처럼 진정 어둠의 힘을 통해 침묵으로 점철된 아픔을 복원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전자상가 사람들은 입을 열고야 만다. 두려움 혹은 폭력만큼이나 아픔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리라 다짐하기 위해. 입을 열고 생각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황정은이 뛰어난 이유다. 그녀는 불편한 일상과 마주하는 법을 안다.


막연한 공포와 허무함이 밀려든 공간에 작은 안식이 찾아온다. 다시 숲은 찾은 무재와 은교는 어김없이 그림자를 마주한다. 피해보고자 애썼던 그들은 여기에 없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 있다.


노래할까요?


몰아치는 삶으로부터 잠시 고개를 돌려 둘은 넌지시 사랑을 건넨다. 사랑. 철거되는 일상 속에서도 그림자만큼이나 건재했던 사랑이 있었다. 빽빽했던 백(百)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니 비로소 이들은 백(白)의 그림자로 환해졌다. 그렇게 소설은 퍽퍽한 삶에서도 놓칠 수 없는 낭만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얼마나 따뜻한 비극인가.


<백의 그림자>는 끝내 세상과 이상 사이를 절취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각자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내일도 그림자를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찾아오는 밤에는 덤덤하게 이런 말을 주고받지 않을까.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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