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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7. 2018

다락방에 달이 뜨면

여기는 아지트가 된다

마음을 터놓는 대학 동기들이 있다. 나를 포함해 총 4명이다. 인원도 많지 않아 단출해서 좋다. 사실 무슨 계기로 가까워졌는지는 잘 모른다.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영문학 전공이라는 점 이외에는 달리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저 모일 때마다 뜬금없는 조합이라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 우리는 구태여 공통점을 찾아보고자 골몰했다. 딱 하나가 있었다. 바로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입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작은 언제나 평범한 일상 얘기다. 학점 관리나 연애와 같은 진부하고도 중요한 일상사 말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공유된 일상은 언제나 꽤 심오한 지점에 다다랐다. 우리는 지금 청년 사회에 저 먼 19세기 철학자의 사상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찾고 있었고 작금의 부조리한 세태에 열을 올리기까지 했다. 딱히 흐름을 제어하지 않으니 다소 부정적인 감상이나 민감한 의견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표정은 상기됐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사방은 트였고 사람은 많았다. 딱히 개의치 않았지만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지나가다 본의 아니게 불편함을 안고 갔을 이름 모를 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에겐 보다 은밀한 공간이 필요했다. 시선에 간섭받지 않고 응어리진 마음을 자유롭게 성토할 수 있는 곳. 소위 아지트라는 곳을 찾아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지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충무로로 향하는 골목에 조그마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장소가 협소했지만 은은한 느낌이 좋았다. 주문하는 곳 옆에 계단이 하나 있었다. 공간이 또 있겠거니 싶어서 삐걱대는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아늑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창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다른 쪽에선 대학생들이 신발을 벗고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바로 여기네.


조용한 분위기에 익숙해질 즈음 구석에 놓인 좁다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나조차 허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굽이굽이 올라가니 다락방 하나가 있었다. 테이블 하나와 두 개 남짓한 쇼파가 전부였다. 위에 달린 주홍빛 전등은 우리더러 빨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라 속삭였다. 나와 동기들은 쾌재를 불렀다.


마음에 쏙 드는 아지트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다락방으로 모였다. 따뜻한 자몽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는 자유롭고 편안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기서 더 솔직해졌다. 소설을 쓰는 동기의 글을 엿보며 묻지도 않은 감상을 열심히도 나눴고 연애에 열심인 동기의 일화를 들으며 부러움에 젖기도 했다. 학과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동기는 유익한 학사 정보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며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나머지의 오감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낯뜨거운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서로를 헐뜯다가도 금세 진지한 고민과 생각을 나누며 머리를 맞댔다.


우리는 서로의 놀림거리이자 부러움이었다.


다락방에서 얘기를 나누면 어느새 창문 위에 달이 걸쳐 있었다. 탁자 위에 은은하게 밴 달빛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 비친 아쉬운 얼굴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랐다. 그 날 하루도 그러했고 친구들과 만나온 나날들도 그러했다. 서로 서먹하게 방황했던 세월이 아까웠다. 망설이며 굼떴던 과거가 후회로 밀려왔다.


묵직한 상념이 밀려올 즈음 나는 동기들을 바라봤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깊은 얼굴들이 고마웠다. 게을렀던 내 일상에 끝까지 남아줘서, 그리고 술을 못하는 나를 위해 언제나 커피와 차를 골라줘서. 그 사소한 고마움들이 밀려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무력감을 잠재웠다. 나는 오래도록 그들을 곱씹었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다짐하며.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군대에 있다. 소설을 쓰던 동기는 마침내 문단에 등단했다. 우리끼리 슬며시 나눠봤던 글은 멋진 소설로 출간됐다. 터무니없이 적은 인세를 받는다며 투덜대면서도 내심 뿌듯함을 내비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랑에 열중하던 동기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적잖은 나이 차이도 극복해내는 꾸준함이 진심으로 부러운 박수를 보냈다. 매사에 열정적이던 동기는 졸업을 앞두고 휴학을 택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다고 했다. 빠르게 졸업하고 취업에만 목을 매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나마 과감한 일탈을 선택한 친구를 응원했다.


그렇게 빠짐없이 알찬 삶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면회를 오겠다던 약속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만나고 싶은 곳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다락방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동기들과 함께 다시 그 다락방을 찾을 심산이다.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어느 달밤을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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