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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2. 2018

로봇은 파레시아에 닿을 수 없다

저널리즘이 위기다. 결국 인공지능 기자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인간 기자들에게는 시한부 선고나 다름이 없다. 이미 세계적인 언론사들은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했다. LA 타임스는 퀘이크봇(Quakebot)이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통해 지진 관련 속보를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기사망을 구축했다. 로이터 역시 2016년부터 속보에 한해 인공지능이 직접 자료를 취합하고 기사를 작성하도록 했다. 결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인공지능을 도입한 언론사들은 정확한 정보로 인해 높은 신뢰도를 쌓았다. 또한 속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검색 유입수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비싼 인건비와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대가로 상당한 이익을 담보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냉소적인 예측이 줄을 잇는 추세다. 예측들이 지니는 결은 비슷하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정확하고 체계적인 알고리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 저널리즘은 단단한 비관론에 물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언제부터 언론이 수행하는 역할이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국한됐는가. 경제적 생존을 위해 언론이 마지막 보루마저 저버려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대가 빨라졌다고 해서 가치마저 빠르게 대체해선 안 된다. 발전된 문명을 의식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회의감으로 점철된 문화지체가 도래하기 마련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지점에 모든 명분을 투영시키며 본래 지녔던 가치를 저버리는 순간 중요한 기틀은 무너지게 된다. 분명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물결은 빠르게 전통적인 본질들을 잠식했다. 슬프게도 저널리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개 저널리즘엔 본령(本領)이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뜻은 다음과 같다. '근본이 되는 강령이나 요점'. 한 영역을 관장하는 질서가 구축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이를 유지하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계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부상하면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부조리한 세태를 짚어내고 교정하는 사회 변혁이 이뤄졌다. 그리고 저널리즘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정의를 위한 비판을 거듭했다. 그 과정 속에서 언론계는 비로소 진실과 중립이라는 목표 의식을 체화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저널리즘의 본령이라 일컫는다. 즉 저널리즘 속 본령이란 역사 속 치열한 고뇌와 질문이 빚어낸 경험적 산물이자 숱한 시행착오를 토대로 형성된 도덕적인 정언명령이다.


로봇이 글을 쓴다는 상상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 저널리즘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 보자.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인 오노레 드 발자크는 저널리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저널리즘은 모든 인간적인 지성이며 문명 그 자체이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명료하다. 저널리즘은 단순한 텍스트(text)를 넘어선 콘텍스트(Context)라는 것이다. 그는 신문이 시대 담론을 형성하는 아고라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신문을 통해 독자들은 시사점을 유추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통해 각기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여러 맥락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형성된다. 바로 그 지점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발자크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가 그랬다. 프랑스 저널리즘은 자본주의라는 파고 속을 유영했다. 당시 사회는 격변했고 권력은 부패했다. 정의로운 가치는 물질주의라는 욕망 아래 함몰되었다. 당대 프랑스 신문은 이런 사회를 조명하며 다양한 불편을 함축한 질문들을 던졌다. 그 결과 군중들은 신문을 통한 계몽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균형 잡힌 사회를 통해 선진화를 앞당기는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1881년 프랑스는 언론의 자유에 관한 법을 제정하며 저널리즘이 수행할 역할을 명시했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는 여전히 신문을 신뢰한다. 2014년 프랑스 일간지가 발표한 '2014 미디어신뢰도조사'에 따르면 라디오와 신문이 각각 신뢰도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반면 인터넷은 37%로 가장 저조했다. 발전한 기술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8세 이상 프랑스인 중 약 70%가 뉴스와 시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통해 유의미한 사회적 맥락을 생산해 온 사회만이 받을 수 있는 결과다. 여기가 중요하다. 정보만 난무했다면 신문이 지닌 위상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다. 신문 속에 담긴 메시지가 대중들이 형성하는 의식과 맞물렸기에 가능한 생존이었던 것이다. 로봇 저널리즘이 대두되는 지금, 그 섬세한 목소리가 지니는 힘을 잊어선 안 된다.


일례로 사설과 논평이 있다. 사견(私見)이 개입되는 만큼 형태도 다양하다. 일상 속 경험담부터 역사 속 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상황에 대한 맥락이 유사할수록, 혹은 너무 이질적이지만 절묘하게 어울릴수록 상상과 비유의 힘은 거대해진다. 유연한 맥락을 위해 고뇌했을 필자에 대한 경외감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나 과연 로봇 저널리즘이 이런 위트를 발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지만 인간이 발휘한 역량만큼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보통 신문은 불과 24시간 내에 일어났던 일들을 담아낸다. 따라서 생생한 현장감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감은 단순히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면밀한 취재를 통한 구체적인 기사 작성은 기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직접 사건을 겪은 당사자가 전달하는 증언이나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아무리 로봇이 오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동일한 개체가 향유하는 미세한 감정까지 잡아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변칙적이면서도 유연한 취재는 숨겨진 찰나를 포착하게끔 도와준다. 그 찰나에 담긴 수많은 의미가 독자들에게 전달됐을 때 신문은 더 많은 사회적 가치와 메시지를 생산해낼 수 있다.


내밀한 시선 역시 중요하다. 앞서 말했지만 신문은 가치적 총체다. 신문 속 정보들은 모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 엮여 새로운 사고를 위한 장을 만든다. 이질적인 정보들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단어 간 유사성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 단어가 사회 내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엇이며 함축하고 있는 가치는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맥락이라는 차원에서 대두되는 문제다. 겉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기사를 내놓는 문제가 아니다. 기사는 곧 인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현상에 대한 기승전결이란 단계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단계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을 조밀하게 해체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 있다. 로봇에게 분석되는 인간 세계를 상상해보라. 편리한 정보 접근성을 떠나 의아한 부분이 여럿일 테다. 단순히 양으로만 승부할 수 없는 세계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미셸 푸코는 저서 <담론과 진실>에서 파레시아(Parrhesia)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파레시아란 모든 감각을 담아 표출하는 인간적인 발화를 일컫는다. 그는 그중에서도 작위로부터 거리를 두며 본성에 가까운 발화를 핵심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가장 솔직할 수 있는 단계에서 나오는 발화를 말한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역설하는 그는 종국적으로 파레시아를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라고 정의한다. 이 대목에서 저널리즘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널리즘 속 파레시아는 곧 가치를 놓고 바른 길을 택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말한다. 그리고 저널리즘은 파레시아와 함께 혼탁한 시대 속 상충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미묘한 정의를 분별해야 한다. 과연 로봇 저널리즘이 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인간과 흡사한 로봇도 파레시아라는 심연에 닿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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