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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25. 2018

끝내 디케는 정의를 흥정했다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을 바라보며

정의의 여신이 안대를 벗었다. 협잡으로 점철된 시대가 펼쳐졌다. 손에 들린 저울은 비열한 욕심이 지니는 값어치를 쟀다. 다른 손에 들린 칼은 사사로움을 위해 무고한 아픔을 내리쳤다. 지울 수 없는 수치심이 사법부에 새겨졌다. 디케가 한낱 장사치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신성한 헌법에 시장논리를 들이댔다. 그들은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재판을 맞춤 제작하여 판매했다. 고객은 정부였다. 부당한 거래 앞에서 삼권분립은 허망한 기치에 불과했다. 견제라는 기능은 유착으로 얼룩졌다.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유혹이 이어졌다. 중요한 사안들은 정부가 원하는 대로 재단됐다. 누군가 간절히 바랐던 정의로운 내일은 황망하게 스러졌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들은 전략이라는 단어로 속물적인 근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부 주요 인사들로부터 상고법원 안건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방안을 모색했다. 심지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대내외적인 단속 강화에 나서기까지 했다. 양승태 대법원은 정부와 협상하며 우위 선점에 주안점을 뒀다. 이 과정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전교조 법외 노조 사건, KTX 해고 승무원 사건 등이 로비자금으로 운용됐다. 많은 이들이 고군분투하며 되찾고 싶었던 일상은 일개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후안무치한 권력은 외로운 진실을 유린했다. 일탈한 법치의 만용이다.


문건에 적힌 말마따나 사법부는 꾸준히 국정 운영을 뒷받침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립성을 결박했다. 본질을 저버리자 이내 자존감마저 희미해졌다. 법치가 지니는 신성한 근간이 송두리째 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평무사가 철칙인 사법행정권은 특정한 이익집단을 위해 남용됐다. 사법부는 국민이 아닌 정권만을 바라봤다. 그동안 권력을 향했던 견제라는 칼날은 국민을 억제하는 칼날로 돌변했다.


양승태 대법원에게 법은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심판대에 오른 무수한 사건들을 지워버렸다. 일터를 잃은 KTX 해고 승무원은 패색이 짙은 내일을 위해 외로이 사투를 벌였다. 법외 노조라는 멍에를 짊어진 전교조는 험난한 소송에 휘말렸다. 법을 믿었던 이들이 치른 대가는 참혹했다. 이권을 위해 거래된 일상은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인내할 따름이었다.


폭력적인 역사를 감내한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제징용 및 정신대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 손해배상 소송들은 십중팔구 패소했다. 결과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미쓰비씨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계류된 상태로 5년을 기다렸다. 진전을 기대했지만 늘 제자리를 답보했다. 정부 기관이 직접 나서서 재판 진행을 방해했다는 정황마저 포착됐다. 오욕을 머금은 시간에는 패배감만이 만연했다. 권력이 난도질한 삶들은 부당하고 지나치다는 수사를 동반했다. 이윽고 이 시간들은 협상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사법농단 문건 위에 새겨졌다. 국가를 신뢰했던 국민들을 기만한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형국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정부와 흥정했다. 비윤리적인 오만함은 인권이 결부된 삶에 하찮은 값을 매겼다. 숱한 희생을 뒤로한 채 사법부는 상고법원 설립을 통한 공정한 재판 문화 확립을 천명했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버린 이들은 자가당착에 빠진 모순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마디로 시도는 무모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이번 사태는 부패한 사법부를 수술대 위에 올려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제공해줬다. 실로 부끄러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년은 사법부를 온갖 이권이 판치는 시장통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출범한 김명수 대법원은 대대적인 사법개혁을 예고했다. 하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최근 검찰이 사법농단 주역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발부를 신청했지만 줄줄이 기각됐다. 진상 파악을 위한 관련인 소환 조사도 지지부진하다. 일각에서는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국민들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거둘 수 없는 이유다.


사법부가 바닥을 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법농단 주동자들에 대한 처벌을 엄중하게 단행해야만 한다. 더불어 과감한 내부 개혁을 통해 공정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전반적인 체질 개선이 이뤄지면 억울하게 빼앗긴 피해 당사자들의 시간을 되찾아줘야 한다. 이는 오직 공명정대한 재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길은 분명하고 시간은 많지 않다. 사법부가 지닌 자정 의지와 결단력이 핵심이다. 디케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두 손에 들린 저울과 칼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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