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 시점 Nov 12. 2018

최악의 하루가 될 뻔했다니까요

영화 <최악의 하루>를 보고

화창한 오후다. 하지만 은희를 둘러싼 관계는 구질하다. 진솔하지도 않고 애절하지도 않다.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에겐 궁상스러운 집착과 어쭙잖은 허세만 가득하다. 허울만 가득하기에 더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 김종관 감독은 그 24시간을 열과 성을 다해 세밀하게 쪼갠다. 파편으로 널브러진 일상 속 단면들은 부끄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조명된다. 얄팍한 감정들이 한없이 나풀대자 수많은 얼굴들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클로즈업을 통해 부각되는 표정과 몸짓은 모두 감정을 위한 훌륭한 매개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오롯이 감정에 초점을 맞췄다.


<최악의 하루>는 내내 아기자기한 감각들을 선사한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감정을 집요하게 잡아 담아내는 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는 범주를 극대화했다. 지질한 감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쇼트들 사이로 빛나는 익살스러운 연출력도 영화적 재미를 챙기는데 큰 몫을 담당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선택과 집중이 가져온 힘이다.



은희는 배우 지망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를 만난다. 길을 잃은 그를 도와주다가 그녀는 이 낯선 관계에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에겐 배우인 남자 친구 현오가 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만난 남자 친구와는 티격태격하느라 정신이 없다. 은희는 끝내 상한 감정을 안고 돌아서 혼자 SNS로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때 갑자기 전 남자 친구인 운철이 나타난다. 그는 남산 주위를 맴돌며 그녀가 남긴 족적을 집착하듯 따라온다. 은희는 피곤함과 괴로움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른다. 정말 제목처럼 되어가는 하루다.


불편한 우연들이 끊임없이 겹치는 순간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조우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했던 이를 함께 만난 순간 은희는 비로소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에 놓인다. 놀랍게도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여러 감정들이 만나고 부딪혀 시종일관 요동친다. 우연이라고 말하기도 버거운 필연 속에서 은희는 관계가 빚어놓은 시간 위를 외로이 걸어간다. 만났던, 만나는, 그리고 만나고픈 이들과 차례대로 마주치며 그녀는 옹졸하면서도 애틋한 사색에 잠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유독 은희는 먼 길 혹은 산 너머에 복작이는 도시를 바라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을 머금은 표정은 점차 은은하면서도 착잡하게 다가온다.



많은 관계들이 병치되면서 은희라는 캐릭터엔 입체감이 부여된다. 그녀는 료헤이에겐 친절하며 현오에겐 까칠하고 운철에겐 심드렁하다. 하루 동안 마주친 세 남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이질적인 자아들이 상충하는 가운데 그녀는 의외로 진실된 태도를 견지한다. 은희와 그녀가 마주친 이들은 그 관계가 이어졌던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운철은 그녀를 향해 "어떻게 진실이 진심을 이겨요?"라고 말한다. 구차하긴 하지만 그들은 한때 분명 행복한 사랑을 나눴다. 설령 그 시절을 왜곡하거나 곡해한다고 해서 피로한 현재가 나아지지는 않는다. 다음 대사를 보면 은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저는 다 솔직했는걸요.


은희는 그저 각자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생동했던 사랑을 한꺼번에 마주쳤을 뿐이다. 그 어지럽고 복잡한 심경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에 최악이라는 단어로 갈음하는 것이다. 물론 그녀 자신조차도 진심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기엔 그녀가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나 긴박했고 다양했다. 유야무야 저질러진 일들이 남산 가운데로 모여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은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고요한 숲 속만큼이나 깊게 가라앉은 마음을 붙잡지 못해 불안했을까. 어쩌면 화면을 가득 메우는 짙은 한숨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단 하루를 선택했다. 그 과감한 선택은 결국 연애라는 일상이 지니는 현실감을 극대화시켰다. 돌발적인 관계가 비추는 피상성과 예측 불허를 통해 작위적인 감상을 최대한 배제했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편한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치졸하고 옹색해질 수 있는지 영화는 은희라는 구심점을 만들어 보여준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일상에서 그녀는 감정마저 위태롭다. 그런 와중에 햇살은 더욱 눈부시게 인물들 위로 내리쬔다. 배경과 상황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누군가 숨기고픈 치부를 끄집어내려고 안달이다.


은희는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이 제발 빨리 흘러가길 말이다.


이윽고 석양이 지고 남산에 밤이 찾아왔다. 은희는 다시 료헤이를 만났다. 걱정하지 말라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마침내 산 아래를 향한다. 몽환적인 빛이 밤길을 비추며 지리멸렬했던 하루를 토닥인다. 이국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얀 눈이 살포시 은희 위로 내려앉는다. 시끄럽게 몽니를 부리던 감정들은 어느새 잔잔해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하루는 낯선 소설가가 건네는 말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있다. 남산길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는 영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온한 미소를 머금었다. 료헤이가 선물한 따뜻한 마무리다. 빛 사이로 명멸하는 거리처럼 아득하면서도 또렷한 하루가 지나갔다. 결국 해피엔딩이다.


분명 여름이거늘 따뜻한 공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끝에 다다라서야 내리는 하얀 눈에서 비로소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 역설이 마냥 사랑스럽다면 과한 감상일까. 낯선 따뜻함이 완전하지 않은 사랑들을 보듬는다. 그제야 영화 속 시퀀스를 가득 메웠던 녹음과 신선한 바람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은희는 그 순간부터 남산이 주는 여유를 만끽했을 테다. 이 지독했던 하루를 등지고 내려가며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마터면 최악의 하루가 될 뻔했다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나처럼 다시 만날 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