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보고
휘황한 금장으로 뒤덮인 궁정은 고적하다. 궁 안에는 우울한 주인이 서성이고 있다. 바로 17명의 피붙이를 잃어버린 상실감에 찌든 여왕 앤이다. 이 지독한 트라우마를 그녀는 토끼 17마리로 달랜다. 앤은 사랑하는 토끼들을 친애하는 벗인 사라 제닝스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사라는 토끼를 싫어한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에도 한계는 있다고 말한다. 이후 비춰지는 여왕의 표정은 복잡하다. 사랑하는 존재들이 융화되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낯설고도 불편했을 테니 말이다. 분명 그녀는 직설적이지만 거짓되지는 않은 저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모순적인 욕망들이 충돌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성과 본능으로 양분되지만 끝내 맞물릴 수밖에 없는 욕망들. 그렇게 <더 페이버릿>은 질척이는 욕망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영화는 애정으로 치부되는 욕망의 가닥들을 세어본다. 앤은 무수한 비극에 짓눌리다 못해 유아기적 욕망에 허덕이는 퇴행적 면모를 보여준다. 거대한 케이크를 필요 이상으로 탐닉하고 구토하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달콤한 일상을 갈망하지만 온전히 성취할 수 없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전무하다. 당시 영국은 신권 강화를 주장하며 등장한 강경파 의회를 양분하고 있던 토리당과 휘그당 사이의 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이자 구심점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여왕은 그저 정치적 이해관계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느 곳에서도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그녀는 아주 순수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 히스테릭한 면모를 내뿜으며 칭얼대는 모습은 한때 엄마였던 그녀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오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풍요 속의 고독과 공허한 위엄을 견디지 못한 여왕은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욕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언제나 사라다.
사라는 영민하고 냉철한 정치가다. 여왕을 대신해 내정 전반을 관리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는 모습은 앤과 대조되는 뚜렷한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녀는 인생에서도 뚜렷한 굴곡이 없었다. 결핍과는 거리가 먼 성장기를 거친 그녀에게 앤은 언제나 연민의 대상이었다. 때론 여왕의 우유부단함과 맹목적인 집착에 대해서 불쾌함을 내뱉지만 사라는 진심으로 앤을 보듬고자 노력한다. 이처럼 연민을 바탕으로 꽃 피운 애정은 둘 사이에 암묵적인 호혜 관계를 형성한다. 사라가 사랑을 주는 대신 앤은 그녀에게 실체적인 권력을 이양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주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전쟁에 대해 사라는 프랑스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편인 말버러 공작이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만큼 확전은 곧 가문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라는 권력이 형성하는 역학관계에 진심을 곁들여 확실한 이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여과 없이 발산한다.
여기에 영화는 또 하나의 관계를 설정한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 하녀 애비게일 힐이 나타나면서 평온했던 관계에 격랑이 일기 시작한다. 애비게일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신분이라는 측면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녀는 구조상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형성할 수 없는 정서적인 공통분모를 만들어 결핍된 현실을 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궁정에 들어온 이후 하층 계급으로 살아가며 터득한 생존본능은 머지않아 권위를 재탈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진화한다. 이후 그녀는 우연히 앤과 사라의 밀회를 목도하게 된다. 독서를 하는 등 귀족적인 처신을 통해 기회를 기다리던 애비게일은 이내 여왕의 마음을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며 사라의 위치에 자리한 자신을 상상한다.
이렇게 영화는 긴밀한 삼각구도를 형성해 내재된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면화시키는 작업으로 들어선다.
권력을 갈망하는 움직임이 강렬해질수록 영화는 여성들에게 더욱 능동적인 영역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사격을 하는 장면이나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이 그렇다. 통상적으로 당대 남성들의 몫으로 여겨졌던 행동들이 영화 속에선 오롯이 여성들이 실체적인 권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격 장면은 권력이 이동하고 있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묘사한 대목이다. 처음에 사라는 애비게일에게 힘을 쟁취하는 것과 그에 따른 책임을 역설한다. 이윽고 뛰어난 사격 실력을 통해 애비게일에게 상대적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후 애비게일이 궁정의 비밀에 파고들수록 사라는 언제나 사격 장면에 애비게일을 데려와 간접적인 경고를 암시한다. 하지만 끝내 애비게일은 쟁취하고자 했던 목표에 다다라 여왕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사라와 함께 한 사격장에선 목표를 멋지게 명중시켜 사라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우열이 명확했던 관계가 뒤집히는 순간이다. 이윽고 애비게일은 여왕의 호출을 받고 사라의 자리를 빼앗는다. 완전했던 사라에게 결핍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그녀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사라와 애비게일의 갈등이 심화되는 동안 영화는 여성들이 지닌 권력에 더욱 집중하며 상대적으로 위축된 남성들을 옅게 조명한다. 이를테면 토리당의 수장 할리는 단 한차례도 여성들의 권력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지 못한다. 설령 통과되는 것조차도 그녀들의 힘을 빌린 연약하고도 일시적인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의 친구 마샴 대령도 애비게일을 흠모하며 성적인 갈망을 표출하는 단순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신분 상승을 위해 마샴을 남편으로 맞은 애비게일이 잠자리를 갈구하는 그를 향해 무성의한 자위를 도와주면서 다음 정치적 목표를 상상하는 대목은 당대 영국 남성 권력의 분위기를 1차원적으로 격하시키며 풍자하고 조롱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게걸스러운 음주가무와 토마토 던지기 등 사치스러운 행위에만 골몰하는 남성들의 추태는 나날이 쌓여간다. 주류인 남성 사회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동안 여성들은 꿈틀대는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곧 등장인물들의 시선이다. 이런 면에서 <더 페이버릿>은 아주 특별한 불편함을 선택했다. 영화 내내 풍경과 인물들은 광각 렌즈와 어안 렌즈를 활용해 둥글게 왜곡된 화면 속에 담겨 전달된다. 더군다나 여기에 로우 앵글이 들어서는 순간 인물과 풍경은 본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의도적으로 상실하는 듯한 뺄셈의 단계에 들어선다.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욕망과 상실이라는 주제에 비춰봤을 때 이 영화적 기법은 실로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아래서 바라본 얼굴은 추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고 완벽한 존재는 원초적인 불안감을 잉태하고 있었다. 색깔이 확실한 캐릭터들이 지니고 있는 결여와 불안을 담아내기엔 손색이 없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직관적이거나 순수한 행보를 택한 적이 없다. 모두 모종의 의도와 계략을 수반한 행동들이었기에 그들이 바라본 목표와 세상 역시 왜곡되어 보였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테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서사는 언제나 욕망이 잉태한 저주가 실현되는 구조를 택한다. <더 페이버릿> 역시 마찬가지다. 애비게일의 계략에 빠져 만신창이가 된 사라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궁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자리를 뻔뻔하게 꿰차고 있는 애비게일에게 사라는 불행을 저주한다. 이렇게 영화의 후반부는 뒤틀렸던 관계가 정립되기 전에 애비게일에게 부여된 저주가 실현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여왕의 침실마저도 장악했다는 도취감에 사로잡힌 애비게일은 무절제한 향락에 취한다. 술에 취해 여왕 앞에서 제멋대로 고꾸라지더니 급기야 그녀는 구토를 한다. 일전에 앤도 그러했듯이 갈망하나 끝내 쟁취할 수 없는 욕망이 구토를 통해 나타나는 순간, 애비게일은 서서히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영화 종반부에 다다르면 두 가지 달라진 점이 선명해진다. 하나는 사라와 애비게일의 위치이며 다른 하나는 토끼 17마리의 위치다. 사라는 앤에게 절제된 사고와 욕망을 강조했다.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도 컸지만 여왕의 위신을 바로 세워야 자신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민과 욕망이 적절한 균형을 이뤘기에 두 사람은 원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앤과의 관계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무한한 욕망만을 투과했다. 가식적인 태도와 감언이설이 한계치에 다다르자 앤 역시도 무상함과 피로함에 젖기 시작한다.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본질적인 권태로움이 불안한 여왕을 잠식한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돌아가 보면 토끼들은 우리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애비게일이 나타난 이후에 토끼들은 자유롭게 방을 활보한다. 그리고 책을 보던 그녀는 토끼 한 마리를 지그시 발로 밟아버린다. 앤에게 토끼가 어떤 존재인지 안중에도 없는 그녀가 무심결에 실현시킨 비극이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그리움이 짓밟힌 순간, 다시 앤에게 상실이 찾아온다.
달콤하게 다가온 이를 믿었던 것에 대한 상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절망 어린 공기가 자욱해지고 수많은 토끼들이 공허한 표정 위에 덧대어진다.
언젠가 사라는 애비게일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지.
<더 페이버릿>은 중독적인 탐닉의 끝에 막중한 대가를 놓았다. 세 여인에게 욕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였다. 욕망으로 향하는 정신에서 쾌락을 느꼈고 막연한 카타르시스에 육체를 맡겼다. 하지만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허망함은 권력을 품은 그녀들에게서 생기를 앗아갔다.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취해 파멸한 마이나데스들처럼 그녀들도 절정에 이르렀던 생명력이 흐려지는 광경을 맥없이 목도하고 있다. 그렇게 란티모스는 너무 인간적이어서 몽매한 욕망을 단죄했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텅 빈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다시 검은 욕망이 칠해질 것이다. 전능한 섭리를 간과한 죄는 이미 영겁의 굴레에 빠졌다. 비극은 다시 비극을 향해 몸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