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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Mar 10. 2020

밥에 대한 단상

아내는 체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몸은 이미 식어버렸다. 모처럼 사온 설렁탕이 차디찬 바닥에 내팽겨진다. 남편은 왜 먹질 못하냐고 부르짖는다. A는 의뭉스러웠다. 체해서 죽다니. 백 년 전에는 그랬나. 짤막한 단상들을 떠올렸다. 퍼석한 밥에 득실거리는 살기. 밥알 하나하나가 할퀴고 지나갔을 목구멍. 철저하게 메말랐을 그 목구멍. 침 한 방울이 야속해 뒤틀리고 야위었을 몸. 당최 가늠할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잡념 앞에선 늘 허기가 진다. A는 책을 덮고 방문을 나섰다. 오늘 저녁은 꼭꼭 씹어 먹으리라 다짐하며.


웬일로 백반집이 한산하다. A는 내심 기뻐했다. 늘 반찬통이 옆에 놓여있는 모퉁이에 앉고 싶던 터였다. 메뉴 고를 처지는 아니더라도 자리 정도는 고를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오랜 푸념을 오늘만큼은 꿀꺽 삼켜도 될 판이었다. 이내 큰 가마솥을 가득 메운 제육볶음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는 한 달 만이었다. A는 2000원에 고기를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무슨 날인가 싶을 정도로 밀려오는 복이 버거웠다. 다시 잡념이 홀쭉해진 배를 쿡쿡 찔러댔다. 아, 기름진 배만 상상해야지. A는 고개를 털고 고봉밥을 쌓아올렸다. 고기기름이 식판 가장자리를 빨갛게 물들이며 밥알 사이로 스며들었다.

     

자리에 앉으니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하철 시설을 정비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기자 앞에서 지인들이 망자의 삶을 횡설수설 읊어대기 시작했다.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단다. 좋은 말들을 나르는 말투는 죄다 건조했다. 잘 모르는데 잘 아는 척을 하려니 고역인 눈치였다. A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무심한 칭찬으로 회자되는 삶이라니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화면엔 청년이 사물함에 두고 간 900원짜리 컵라면 하나가 덩그러니 비춰졌다. 분명 일이 끝나고 허겁지겁 때울 끼니였으리라. A는 인스턴트 국물 한 방울도 적시지 못하고 닫혀버린 목구멍을 상상했다. 밥 대신 억울하고 황망하다는 말이 꽉 채워져 있겠지.

      

식판 위엔 여전히 고기가 가득했다. A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남기면 환경부담금 1000원을 받는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늘 부담스럽던 저 말이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새 식당엔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 많던 제육볶음은 온데간데없고 어묵볶음이 자리를 대신했다. 좀 더 일찍 올 걸이라며 아쉬워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A는 다시 식판을 바라봤다. 식어버린 고기들이 그득했다. 나도 이 기름진 복을 다 먹을 팔자는 아닌가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도 A는 생각했다.

     

밤이 되어도 완연한 봄 날씨였다. A는 이 좋은 날에 감겨버린 젊은 눈을 떠올렸다. 아까 읽었던 소설도 떠올렸다. 체해서 죽은 삶이나 못 먹고 죽은 삶이나 쉽사리 와 닿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백 년 전 그녀는 설렁탕을 남긴 채 떠났고 오늘 한 청년은 컵라면을 남기고 떠났다. 어째 삶이 더 퍽퍽해진 것만 같은 기분에 속이 부대꼈다. 고기 내음을 머금은 트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A는 연신 밤공기를 들이켰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기 냄새였다. 터벅터벅 걷다보니 횡단보도 앞이었다. 길 건너편 편의점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는 남자가 보였다. 1000원도 되지 않는 끼니를 허락받는 삶과 허락받지 못하는 삶은 뭐가 다를까. 다시 잡념이 뱃속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알다가도 모를 인생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오늘 밤은 얼마나 길까. A는 가만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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