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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Dec 06. 2021

사다리에 오르다

누구나 봤지만 누구도 오르지 않은 그곳

“우리에게 내려갈 사다리는 없습니다!” 아침 8시. 태석은 붉은 두건을 동여매고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공복으로 버틴 지 어느새 아흐레. 그런데도 타고난 뱃심인가 싶을 정도로 목소리는 우렁차다. 고개를 들어 첨탑 꼭대기를 바라봤다. 옅은 햇살에 덮인 검은 얼굴. 깊게 패여 음영이 진 두 볼. 앙상하게 야윈 팔목. 9일 전, 태석은 물이 든 1.5L 페트병 3개만 들고 푸른 첨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비좁은 통로는 더위와 추위에 뒤척일 자유마저 허하지 않는 듯 갑갑해보였다. 그럼에도 내려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주먹이 그냥 올라간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막막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꺼내려 작업복 안주머니를 뒤지던 찰나, 열흘 전 녀석이 내게 건넨 쪽지가 있었다. 형. 난 이곳을 가득 메운 어둠이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곳에 햇살이 칭칭 감길 때마다 우리, 아득하게나마 인사합시다. 단 두 줄. 그 행간에 숨어버린 마음을 가늠할 길은 없었다. 그저 녀석을 오매불망 기다릴 제수씨와 네 살배기 딸이 걱정될 뿐이었다. 기어코 성역으로 들어갔네. 휴가에서 돌아온 작업반장이 혀를 끌끌 찼다. 우리 사이에서 첨탑 꼭대기는 성역이었다. 누구나 오를 수 있지만 누구도 오르지 않는 곳. 여태 저기 올라간 자들은 모두 직업을 잃고 일상을 잃었다. 문득 지난 노사위원회 정기회의에서 사장이 했던 바벨탑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분. 바벨탑 알죠? 하늘에 닿고 싶었던 인간들이 쌓았던 높은 탑 말이에요. 근데 신이 열 받은 거야. 인간 따위가 신을 넘보다니 말이야. 그래서 서로 말이 안 통하게 해버리고 불신과 갈등을 심어버렸어요. 그렇게 바벨탑은 무너졌어요. 완성되지도 못한 채요.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권리가 의무를 넘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회사에도 성역이라는 게 있어요. 기분 나쁘게 듣진 마세요. 내가 말하는 성역은 공생을 무너뜨리는 선이에요. 함께 먹고 사는 일에 훼방을 놓는 건 책임회피이자 월권이라는 겁니다. 제 할 일 제쳐두고 동료들 난처하게 만들면서 호소하는 간절함이라. 여태 숨겨둔 이기적인 민낯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닌가요? 의무 없는 권리는 없어요. 


태석은 사장의 선언 이후 첨탑에 오른 첫 번째 직원이었다. 생각해보니 회의 자리에서 유독 녀석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야근 중인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왔다. 녀석은 커피를 건네곤 연신 모래바닥을 차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아까 사장이 했던 성역이라는 말 기억나요? 이거 선전포고에요. 해보자는 거지. 회사 사정도 하루 이틀이지.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 받고 일하는 게 말이 돼요? 작년에 야간작업하다가 트레일러에 손 작살난 순철이 형. 산재 처리도 못 받고 쫓겨나듯 나갔잖아요. 야간에는 가동속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그 알량한 안전수칙 하나 어겼다고. 일 좀 열심히 해보겠다고 한 사람한테 저 사장이란 인간은 허점이나 들춰서 후벼 판 거라고요. 밖에 있는 저 첨탑. 내가 오를 겁니다. 저 녹슨 사다리에 우리 선배들의 땀이 묻어 있어요. 형. 그 무수한 땀 고이 쥐고 올라서 외칠 겁니다. 올라갈 사다리는 있어도 내려갈 사다리는 없다고요. 역사가 말해주잖아요. 성난 프랑스인들이 자유를 외치며 바스티유 감옥 외벽을 넘을 때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죠. 그렇게 계급이 깨졌고 민주주의라는 말이 생겨났어요. 아득한 줄 알았던 성역이 사다리 하나로 무너진 거죠.      


녀석은 가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형. 어쩌면 오른다는 말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하고 같을지도 몰라요, 난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매일 새벽 댓바람부터 김밥을 마는 아내 뒷모습이 떠올라요. 부은 얼굴로 잘 다녀오라며 고사리 손 흔드는 딸내미도 생각나고요. 그 존재들이 적어도 불행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다가는 한없이 가라앉을 거 같아요. 그래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 외치려고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죄송해요. 왠지 형만큼은 저 이해해주실 거 같아서. 날 추운데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그렇게 다음 날 녀석은 물 세 통만 든 채로 첨탑 위에 올랐다.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2시에 50번씩 구호를 외쳤다. 내려갈 사다리는 없다. 내려갈 사다리는 없다. 내려갈 사다리는 없다...   

  

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2시 5분. 이미 구호가 시작됐어야 할 시간인데 첨탑 꼭대기는 조용했다. 태석은 가만히 누워있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괜찮은지 묻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대답이 없었다. 평소 보내던 수신호도 묵묵부답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전화기를 들어 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1분이 넘도록 애꿎은 신호음만 흘렀다. 첨탑 밑은 어수선해졌다. 큰일이 났다며 각자 119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분주한 움직임 사이로 사장이 탄 차량이 정문을 지나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도와달라며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말았다. 천연덕스러운 그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할 재간은 없었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태석이 올랐던 저 사다리를 오르는 일. 나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첨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서히 햇살이 첨탑 꼭대기에 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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