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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Mar 03. 2022

소신에 야박한 정치

왜 소신의 정치는 규모의 정치를 이기지 못하는가

한국에서 정치는 소신의 무덤인가. 이 불쾌한 의문은 몇 년째 가실 기미가 없다. 중요한 대목마다 소신의 정치는 규모의 정치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합당, 단일화, 지지성명 등 그럴싸한 단어로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곤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이 뒤따른다. 대의의 정치적 용어는 권력 획득이다. 상대를 이기려면 규모를 키워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얻어야 모든 권력을 잡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신은 규모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규모 없는 소신은 치기 어린 발악으로 치부된다. 결국 남는 건 진흙탕 정쟁 뿐이다.


국민들이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사회. 불행히도 우리 역사는 늘 그래왔다. 조선조로 돌아가보자. 중중 시절 조광조는 개혁을 통해 알력 다툼으로 얼룩진 정쟁을 혁파하고자 했다. 허나 개혁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정치권에서 그의 개혁은 그저 사회 전복을 위한 시도이자 왕권을 능멸하는 반역이었다.


혹자는 그의 실패 원인을 급진성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성급하고 과격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조광조는 누구보다 유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연산군이 없앤 성균관을 다시 세워 향약을 보급하는 등 유학을 진작시키고자 노력했다. 당대 관점에서 잘못이 있다면 민본정치를 강조한 것일 테다. 백성이 근간이 되는 정치. 임금이 성은을 하사하는 정치 구조에선 용납하기 어려운 얘기다.


반정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특정 세력의 권력을 담보하는 보은 정치를 청산하고 능력주의에 입각해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당연히 권세를 누리던 위정자들에게 조광조는 눈엣가시였다. 그가 주장하는 개혁 전체는 그를 제거해야 하는 명분이 되었다.


다시 물어보겠다. 과연 조광조는 성급하고 과격했을까. 적어도 누군가에겐 그랬을 테다. 권력을 쥐고 흔들던 유력 가문들 말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조광조를 제거한 위정자들은 개혁에 실패한 그를 성급하고 과격한 패자로 기록했다. 수백 년이 지나 그의 말이 맞았다 인정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치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유기체다. 실현되지 못한 이상에 시대를 앞서갔다는 위안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을 무르익지 않은 개혁이라 평했다. 과연 그게 진짜 문제였을까. 변화의 목소리를 기성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한 위정자들의 자격지심에는 책임이 없을까. 개혁이란 존재는 본디 성숙할 수 없다. 미증유의 사회 질서를 제시하는데 성숙한 형태를 가늠할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개혁을 포용할 만큼 사회의 자세가 넓은가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소신은 그저 규모의 정치에 밀렸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결과론적으로 바라보자. 반정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조광조 같은 개혁 세력마저 제거한 훈구 세력은 이후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그들은 남인, 서인 등으로 나뉜 채 잇따른 환국을 거치며 권력 쟁탈에 몰두했다. 백번 양보해 군주제 아래 근본적인 사회 개혁은 힘들었을지라도 권력을 위해 이합집산하며 진영 논리에 빠지는 건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다. 결국 그들이 조광조를 제거한 건 더 나은 사회를 위함이 아니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 그 자체였을 뿐이다.


다시 2022년으로 돌아와보자. 군주제는 사라졌고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하지만 군주제 시절 이야기를 들어도 이질감이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오랜 제언처럼 유사한 형국이 재현되는 탓일까. 총선이나 대선 시즌에 간간히 등장하는 조광조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규모의 정치에 밀리기 때문이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선에서 기호 3번 아래가 당선된 사례는 전무하다. 거대 정당을 보필하는 위성 정당, 실속 없는 외침이란 취급을 받으며 반짝하고 사라진다. 3억이란 거금을 들여 선거에 참여하는 그들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한다. 대세에 편승하거나 장렬히 전사하거나. 양분된 권력 아래 정치 제3지대가 맞이해야 하는 숙명이다.


왜 우리 정치는 소신에 야박한가. 물론 선진화된 정치를 위해선 정당 정치 발전이 중요하다. 개인보다 집단지성으로 다져진 정당의 정치 기조를 지지하는 게 탄탄한 사회 변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위해서라도 소신은 더욱 중요하다. 구태를 답습하고 진영 논리에 천착해 선거철마다 정당 전체가 입을 모아 상대를 비방 일변도로 대하며 내가 낫다고 주장하는 정치는 진정한 정당 정치가 아니다. 개인의 소신을 중앙 정치에 내세울 수 있는 아량과 뚝심, 그리고 그 소신이 맞다면 주류로 만들 수 있는 과감함이 정당 정치의 뼈대다. 더 이상 선거에서 이겨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개혁의 목소리를 집어삼켜선 안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처음부터 완성형인 개혁은 없다. 시행착오가 두려워 개혁을 가로막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정치는 소신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그게 지금 기성 정치권이 부르짖는 다원화 민주주의와 다당제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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