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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May 19. 2022

반지성주의라는 아이러니

해답은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있다

반지성주의는 원래 안티 엘리트 개념으로 등장했다. 소수 엘리트가 지식 재화를 독점하며 우매한 대중을 유리시키고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반지성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대중의 대변인이라 칭한다. 대결 구도만 보면 엘리트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소수가 향유하는 지식보다 만민의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이상향이자 태생적인 지향점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주체들은 모두 엘리트다. 작금의 한국이 좋은 예시다. 여야 정당은 상대의 정치적 행보와 발언을 반지성주의라는 말로 일갈한다. 정적(政敵)을 몰상식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마치 반지성주의를 상호 간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 혹은 엘리트들의 알력 다툼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 같다.


엘리트를 견제하기 위해 태동한 존재가 엘리트의 힘을 키워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아이러니다.


70년 전 미국을 애국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이 그랬다.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조지프 맥카시는 반공주의라는 기치를 무기로 삼고 민주당 계열 진보 지식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청문회장에 소환된 지식인들은 일방적인 추궁 아래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다. 의혹에 대한 소명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혐의가 구체적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를 수호한다는 애국심은 어떤 논리보다 강한 당위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매카시는 이념이란 명분을 만능으로 여겼다. 수단이야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근거 없는 인신공격, 정황 부풀리기 등 어설픈 낭설조차도 공산주의라는 라벨만 붙으면 명백한 반역의 증거로 둔갑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 증거를 맹신했다. 몇 년 뒤 미국 언론에서 매카시즘의 허술한 실체를 밝혔음에도 대중이 매카시의 애국심에 보내는 신뢰는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매카시즘은 대중으로부터 막강한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훗날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매카시즘을 반지성주의의 예시로 들며 ‘정신적 삶과 지식, 그것들을 향유하는 이들에 대한 의심과 분노를 나타내는 경향’이라 정의했다.  우리는 호프스태터가 매카시즘을 예시로 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공주의 프레임 아래 맹목적인 비난을 동반해 인격살인을 자행한 현상이 반지성주의의 예시라면 그가 내린 정의에 적힌 의심과 분노는 이성적인 영역과 다소 거리감이 있다. 다시 말해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는 의심과 분노가 지나친 확증 편향으로 이어지며 대중으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상에 가깝다. 매카시, 더 나아가 그가 속한 미국 공화당은 이런 성질을 활용한 것이다.


오늘날 통용되는 반지성주의는 이런 호프스태터의 정의에 기반한다. 여기서 이미 엘리트 대 대중의 대결 구도는 깨지고 엘리트와 엘리트의 신(新) 대결 구도가 도래했다.


주목할 점은 대결 구도가 바뀌자 반지성주의 개념에서 엘리트와 대척점에 있던 대중이 이젠 엘리트의 세력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지배자보다 봉사자의 마인드를 강조하는 엘리트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무지한 존재에서 현명한 왓치독으로 신분 상승을 이룩했다. 선거철만 되면 매스컴을 장악하는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프레임이 대표적이다. 날 선 토론과 공방 속에서 회자되는 국민들의 모습만 놓고 보면 현명한 민심이 반영된 투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모양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표로 다른 결과를 낳아도 실수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정말 엘리트들은 민심을 살피는가? 물론 민심이야 살필 수밖에 없다. 투표로 권력을 획득하는 민주 사회에선 민심이 힘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민심을 살피는가에 대해선 알 도리가 없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여전히 비난 일색인 여야 공방과 국회에 계류된 채 쌓이는 민생 법안이 나날이 늘어나는 형국으로 봐선 의심이 갈 따름이다.


둘째, 정말 대중은 신분 상승을 이뤄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닌 것 같다. 뉴미디어에서 횡행하는 가짜 뉴스 등을 구심점 삼아 이념에 따라 세력을 형성하고 상대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며 마녀사냥을 이어가는 모습은 저 옛날 매카시즘과 다를 바 없다.


본질적으로 확증 편향과 집단 이기주의는 엘리트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자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자정 능력이 결여된 여론만큼 휘두르기 쉬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앞서 언급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프레임에 담긴 저의를 의심할 만한 근거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잠식한 반지성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여기저기서 반지성을 외쳐대느라 누가 반지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라는 건 분명하다. 어쩌다 우리 모두는 반지성의 늪에 빠져 힐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는가. 아무래도 잘못은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있다. 여전히 민심을 도구로만 여기는 엘리트의 오만함과 진실보다 이념 범벅인 주장에 빠져드는 대중의 안일함을 놓고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반지성을 구분해내는 힘은 엘리트의 정직한 의지와 대중의 균형 잡힌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분명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과제다. 그러니 상대를 반지성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지성의 위치에 올려놓고자 하는 욕심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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