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원 Jun 30. 2016

그는 소시오패스인가, 아닌가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포일러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그는 소시오패스인가, 아닌가. 이 영화의 전반은 점점 삐뚤어지는 케빈의 모습과, 그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하는 에바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소시오패스는 선천적인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에바에게서 보이는 모성애의 해체 또한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는 대부분 '부모는 자식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쏟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다면 과연 그게 맞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번 영화 리뷰에서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주관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해볼까 한다.






만약 아이들이 전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먼저 영화는 스페인의 축제 '라 토마티나(La Tomatina)'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붉은색과 붉은 토마토를 온몸에 뒤집어쓴 에바의 모습. 이 영화에서 붉은색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첫 장면에서의 붉은색은 '젊은 시절 에바의 열정'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케빈을 임신하기 전, '모험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적이던 과거의 에바와 잘 맞아떨어지는 의미라 생각한다.



 그 후 현재로 넘어간다. 현재의 모습에서도 바로 붉은색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집 외벽에 넓게 붉은 페인트가 뿌려져 있고, 그 페인트 때문에 집안은 전부 붉은빛으로 가득한 모습이다. 현재에서의 붉은색은 눈을 아프게 하면서, 기분 나쁜 느낌을 주고 있다. 그에 비춰 본다면 현재에서의 붉은색은 '에바의 아픔과 케빈이 저지른 일, 악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에바는 벽에 묻은 빨간 페인트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마치 그 페인트가 원래 있었던 것 마냥.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에바는 이 페인트를 지우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여기의 붉은색은 케빈이 저지른 일, 악, 에바의 아픔을 뜻한다. 그것에 비춰 본다면, 에바는 페인트를 지움으로써 케빈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속죄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과거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제는 벗어나겠다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에바 얼굴이 케빈 얼굴로 바뀌는 모습

 그리고 이 장면은 케빈과 에바가 닮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그 어떤 이질감도 없이 에바의 얼굴이 케빈의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볼 때에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한다면, 케빈과 에바가 이질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닮아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현재의 모습에서 에바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있다. 과거에는 잘나가던 모험가였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에바를 원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케빈은 그 누가 봐도 악질적인 사건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엄마인 에바가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 그래서인지 현재의 에바는 모든 일에 무심하고 힘이 없다.



 그리고 또다시 과거. 프랭클린은 에바에게 오늘이 안전한 날인지 묻는다. 아이가 생길 위험이 있냐는 물음이었고, 에바는 잘못하면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결국엔 그 하룻밤의 부주의로 케빈이 태어나고 만다.


 아이가 생겨 낳기는 했지만 에바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프랭클린이 케빈을 안고 있지만, 에바는 등을 꽃꽂이 세우고 앞쪽만 응시할 뿐이다. 이 모습에서 에바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케빈이 태어난 후 에바는 케빈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케빈과 에바는 늘 같이 붙어있는데, 케빈은 늘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초반에는 에바도 그런 케빈을 달래 보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모든 시도에도 케빈은 늘 울음을 터뜨려 에바는 결국 포기한다.

 에바도 처음에는 케빈을 사랑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케빈을 달래는 모습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짜증을 내고, 무관심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케빈에 대한 미움이 커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미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이 장면에서 그것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여기가 프랑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에바는 케빈에게 직접 저렇게 말을 한다. 이 말에서 에바가 케빈을 축복이 아닌 불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케빈이 없었다면 프랑스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모습에서, 에바가 케빈을 '아들'이 아닌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케빈은 에바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됐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케빈은 에바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부터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공을 던져줄 수 있음에도 안 던져주다가, 딱 한 번 다시 던져주는 모습. 어떻게 보면 그저 반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케빈은 공을 던져준 후 에바를 주의 깊게 살핀다. 에바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그렇게 케빈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에바의 반응을 살피면서, 에바가 원하는 대로 해야 케빈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사를 하게 되고, 에바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케빈에게 에바는 특별하게 꾸미는 것이라고 한다. 그게 뭐냐고 되묻는 케빈에게 에바는 네 개성이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 답한다. 너도 아는 그 개성 말이야,라고. 이 말에서 에바가 케빈을 부정적이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이라기보단 '내 삶에 끼어들었으면서 괴물 같은 모습을 가진 아이'. 에바에게 케빈은 가족이라기보다는  타인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또한 케빈은 에바의 공간을 물감으로 더럽힌다. 급작스러운 행동에 우리는 '대체 왜?'라고 반문하게 된다. 하지만 세계지도로 가득한 그 공간은 케빈에게 있어 에바가 떠날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 에바의 사랑을 갈구하는 케빈에게 있어 가장 부정적인 공간. 하지만 에바는 그저 화를 낼 뿐이다.


 그 후 케빈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문제가 생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저귀를 간 직후 또다시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 그 때문에 에바는 화가 나 케빈을 던졌고 케빈의 팔이 부러진다. 그런 후 케빈이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은 에바가 무서워 그런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에바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또한 기분 나쁜 행동을 해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아이가 되어, 에바의 무관심에 이유를 부여하려 한 것이다.



 케빈이 10대가 된 후에도 에바와의 사이는 좋지 않다. 쌓이고 쌓인 감정들이 풀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케빈이 10대가 된 후의 장면 중 이 부분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서점에 서서 에바에 대한 광고를 봤음에도 서점에 가지 않았다 하는 케빈. 그냥 반항인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전설적인 모험가 에바 캐차도리언'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니 그랬다.

 

 케빈에게 그 광고와 광고 문구는 에바가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느낌을 다시금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케빈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느끼는 감정이지만 영향을 주기에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케빈은 에바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으로 서점에 가지 않았다 대답했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도 케빈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에바의 말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에바가 싫어할 행동을 한다. 심각한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발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사랑받지 못해, 아예 사랑받을 수 없을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 여전히 케빈은 기저귀 사건에 멈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의 행동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 케빈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말이라 더 넓게 본다면 자신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없다는 뜻일 수 있다. 무의식 중의 케빈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만, 현실의 케빈에 자신의 행동아무 이유 없는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케빈의 행동들은 결국 부모의 이혼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프랭클린은 에바가 너무 예민해서 케빈을 그렇게 보는 거라 생각했고, 에바는 사실인데도 믿지 않는 프랭클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둘은 늦은 밤 이혼 이야기를 꺼냈고, 양육권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방에서 나왔던 케빈은 자신의 양육권이 프랭클린에게 간다는 것을 듣게 되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언젠간 떠날 것 같던 에바가, 진짜로 떠나게 되었으니.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케빈은 살인을 저지른다. 같은 학교 학생들과 에바를 제외한 가족들을 죽인 것이다. 학생들을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케빈은 그 일 때문에 힘들어할 에바를 생각했을 것이다. 가족들을 죽인 것도. 케빈에게 있어 이 살인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은 에바에 대한 가장 최고의 복수였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에바가 케빈의 옷과 침대 등을 정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분명 이혼한 후 혼자 사는 집이었고, 케빈은 살인사건 때문에게 아직 교도소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에바가 케빈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무슨 일을 저질렀든 결국 케빈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엔 자신의 아들이기에, 사랑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흘려들었던 케빈의 말이 다시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그때에는 케빈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냥 듣고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가 되어 케빈에 대한 마음이 점점 열리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자신은 케빈에게 익숙했을 뿐, 사랑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 생각은 혹시 케빈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의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생각이 이어져 케빈에게 왜 그랬냐는 물음을 던진다. 자신 때문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답을 듣기 위해.




 케빈의 대답은 오묘하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모르겠다는 대답.

 모든 해석에 맞춰 이 말을 생각해본다면, 한 가지 의미로 일축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행동들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 케빈이 원래 알고 있던 것. 하지만 자신이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깨닫게 되면서,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혼란스러워서.



 그리고 에바가 케빈을 안아주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끝난다. 예전이라면 뿌리쳤을 케빈이지만,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는 케빈. 어쩌면 이 장면은 서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두 사람이, 서서히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속 상징적 장면 



 이 영화는 정확히 보여주는 것보다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 장면만 다룰까 한다. 다름 아닌 케빈이 리치를 먹는 장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클로즈업을 하는 건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알아차리고 꽤나 소름이 돋았었다.


 그냥 본다면 과일을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전에 동생 실리아의 눈에 문제가 생기는 장면이 있다. 밖에 나와있던 세제를 실리아가 만지게 되어 문제가 생겼는데, 에바는 그 원인을 케빈이라고 의심한다. 그런 중에 이 장면은 소름 끼치면서도 징그럽다. 딱 사람의 눈 크기와 비슷한 리치. 싫어하는 과일임에도 그것을 먹는 케빈. 실리아의 눈을 그렇게 만든 것이 케빈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전혀 가볍게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처음 볼 때는 이해하기 힘들어서였고, 두 번째에는 이해가 되면서 무서운 주제구나 싶어서였다.


 감독은 '만약 아이들이 전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약 원하지 않던 임신을 한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생각에 맞게 케빈은 사랑스럽기보다는 무서운 존재였고, 그런 케빈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났다.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케빈을 '소시오패스'라고 정의 내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케빈이 과연 소시오패스일까? 케빈은 소시오패스가 아닌 사랑에 목마른 아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악질적인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케빈을 '소시오패스'가 아닌 '괴물'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괴물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나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바의 모습에서는 모성애의 해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모성애'를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한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희생……. 하지만 에바는 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케빈을 사랑하지 않고 밀어내며 희생하지도 않는다.


 여러 의미를 가진 영화지만,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케빈이 아닐까 한다. 케빈이 그렇게 된 이유.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변하는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원제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은유 하나에 사랑과 우정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