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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Aug 05. 2017

무제

<습작>

 그녀는 더 이상 성녀도, 동정녀도 아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그녀는 더 이상 성녀라고, 동정녀라고도 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폭탄의 굉음을 들었다. 그 당시 그녀가 있던 그 나라는 그랬다. 하루에도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적군에 대한 보복으로 하루 종일 총이 난사되는 것은 일상 다반사였다. 그런 와중에 태어난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 어려워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 그대로 '그녀'라고 불렸다. 그녀가 흔하디 흔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녀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또다시 유럽으로 간 것은 그녀가 태어나고 5년째 되는 날이었다. 날짜를 맞춘 것은 아니지만, 딱 그날에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 그녀의 부모는 미국으로 떠났다. 엄밀히 말해 피난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미국에서 그들을 보는 시선은 딱히 좋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가족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유럽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그녀가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족들이 유럽에 정착하고 난 후였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핍박받지 않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부모는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그녀의 가족들이 천주교도가 된 것은 유럽으로 떠나온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평온한 삶을 살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녀는 성당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내가 왜 가야 하냐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 그녀의 신앙심이 깊어진 것은 그녀가 열다섯이 될 무렵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온 그녀는 넋이 나가 있었다. 왜 그러냐는 부모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러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 명의 마리아를 마주하게 된 것은 성경을 읽기 시작한 후였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성경을 정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 동안 성경을 읽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내가 그녀를 만난 이후 가장 생기 넘치던 때라 확실히 기억한다. 그녀는 내게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정녀 마리아(혹은 성모 마리아)에 대해 말했다. '멋지지 않아요? 예수를 잉태하신 분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보신 분의 이름이 같다니! 안 그래도 나도 이름다운 이름을 갖고 싶었는데, 마리아로 해야겠어요.' 한껏 상기된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게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을 갖게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마리아의 죽음이 찾아왔다. 성범죄였다. 일생동안 차별받은 적이 없었던 마리아는, 그녀의 마지막에 차별을 받았다. '난민'이라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다. 성녀와 동정녀의 이름을 딴 그녀의 이름이 무색하게, 그녀는 겁탈 당해 죽었다. 그러니 다소 냉소적일지 몰라도 그녀는 더 이상 성녀도, 동정녀도 아니다.



 훗날 알게 된 것은 마리아가 죽은 날 그녀의 가방에서 뜬금없이 쪽지가 나왔다는 것이다. 두어 번 접은 쪽지의 가장자리는 잔뜩 쓸려서 찢기기 일보직전이었다고 했다. 그 쪽지에 적힌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 그녀가 나를 봤어.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 나는 뭐지? 나는 뭐지? 이렇게 가버려도 되는 거야? 그녀. 그녀는 누구지? 누구지?


 

 지금 생각해보건대, 그 쪽지를 적었던 그때 마리아에게 신앙이 필요해진 게 아닐까? 이름이 필요해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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