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 - 오늘같은 이런 창 밖이 좋아"를 바탕으로
2012년 10월 3일. 당신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이젠 내게만 존재한다. 검은색이 덕지덕지 붙은 장례식장이 휑하다. 당신은 너무 나만 생각했다. 그러니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이 될 수밖에.
늦은 오후, 오랜만에 집을 나왔다. 조용한 골목길을 지나, 당신과 자주 거닐던 거리로 나왔다. 문득 당신과 했던 마지막 약속이 떠올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장소는 우리가 좋아하던 아담한 카페였었다. 그 카페로 가기 위해 오른쪽의 좁은 골목길로 발을 돌렸다. 골목길에 드문드문 보이는 개나리가 참 샛노랗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꽃이었는데…….
카페는 여전히 아담하고 예뻤다. 나를 반기는 주인아주머니도 여전했다. 왜 혼자 왔느냐는 물음에 웃음으로 답하고,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습관처럼 유리창에 팔을 기대고 창 밖을 봤다. 흐린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다.
뭘 마실 거냐는 아주머니의 물음에 당신이 좋아했던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창 밖을 보니 그 사이 벌써 비가 오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도 비가 왔었는데. 갑자기 온 비 때문에 우산도 없이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오던 당신이 생각난다. 빗물로 젖은 얼굴이 꽤 차가워 걱정하는 내게, 당신은 괜찮다며 웃어 줬었지. 멍하니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아주머니께서 커피를 들고 오셨다. 아주머니께서 공짜라며 같이 내어주신 것은 티라미수였다. 웃으면서 "왜, 그 총각이 이거 좋아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셨다. 그 말 속에도 당신이 있어,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당신이 마실 때마다 왜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었던 카페모카는 당신이 좋아할 만했다. 당신은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난 단 것을 그만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늘 이 카페에만 오면 카페모카를 권했고, 난 늘 '단 건 별로'라며 거절했었다. 그랬던 당신 생각이 나서, 카페모카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에 속이 쓰리긴 했지만, 맛은 꽤 괜찮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마셔볼 걸……. 조금 후회된다.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정사각형으로 잘린 티라미수는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포크로 한 입 먹어보니 역시 단맛이 강했다. 부드럽게 녹는 것이 꽤 괜찮기는 했다. 이래서 당신이 좋아했던 거구나. 단 것도 단 거지만, 부드러워서 더 좋다던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된다. 이래서 그렇게 즐겨 먹었던 거구나 ―, 당신이 좋아하는 이 음식들을, 당신과 먹었어야 했는데. 난 너무 나만 생각했었구나.
당신은 늘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했었다. 그 일이 무엇이든,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작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도 당신은 참 어리석은 짓을 했었다. 그 날 나는 아끼던 강아지를 잃어버려서,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말리려고 했지만, 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강아지는 찾지 못했고, 사람이 많은 거리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울었다. 당신은 나를 발견하고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입혀줬고, 정작 자신은 추위에 덜덜 떨었다. 결국, 당신은 감기에 걸렸고 그 여운이 한 달은 갔었다. 감기 때문에 골골대면서도 내게 웃어줬었지―. 그래, 그만큼 당신은 너무 나만 생각했었어.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당신이 참 좋아했었는데. 그리고 당신은 비가 오면 늘 편지를 썼었다. 누구에게 쓰는 거냐고 물어도 "그냥, 쓰고 싶어서."라고만 대답했었다. 오늘따라 당신이 했었던 것들을 하고 싶어져, 가방을 뒤져 종이와 펜을 꺼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조금 막막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 편지의 수신인은 당신이다.
늦은 밤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우산이 없었던 탓에 비를 그대로 맞고 와서, 조금씩 오르는 열로 몸이 뜨거웠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내가 나오지 않자 급기야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저 사람은 포기할 마음 따윈 없는 것인지, 내가 나올 때까지 문을 두드릴 기세다. 이 소음을 없애기 위해서 결국 문을 열어줬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뜻밖에도 당신의 친구 J였다. J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뭐에요?, 하는 내 물음에 J는 한 번 더 숨을 내쉬었다.
"후―. 편지…에요. 꽤 많던데. 다 S한테 쓴 것 같아서요―."
당신은 또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편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올 때마다 쓴 그 편지들이 아닐까, 편지가 그렇게나 많다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는 J의 표정이 묘하다. 그럴 수밖에. 내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하고 있으니까. J는 두어 번 나를 살피는가 싶더니 갈게요, 하고는 뛰어갔다.
편지가 들어 있는 상자를 거실에 내려놓고, 천천히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J가 말했던 것처럼 많은 편지들이 있었다. 당신이 쓴 편지의 수신인은 나였구나. 그래서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편지들은 하나같이 총천연색이었다. 눈을 찌르는 원색 때문인지, 조금씩 긴장된다. 당신은 도대체 내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얼마나 많았던 걸까. 제일 먼저 뜯은 파란색 편지봉투에는 동글동글한 당신의 글씨체가 그대로 보였다. 내가 여자 글씨체 같다고 웃었었지…….
당신을 만난 지 3년 만에 보는 이 편지들은 참 서글프다. 당신은 내 편지를 볼 수 없겠지. 오늘따라 당신이 그립다, 평소보다 더.
S.
오늘도 비가 와. 비가 오면 가끔 슬퍼지기도 해. 마음이 편해지긴 하지만.
S, 혹시 그 거리 기억나? 벚꽃 눈이 향기롭게 내리던 그 거리 말이야. 벚꽃 눈에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참 예뻤었는데.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비 냄새가 나. 이 비 냄새를 맡으며 너를 만나러 가겠지?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 1시간 후면 보게 될 텐데 말이야.
편지 쓰는 것도 습관인 것 같아. 많이 쓰지도 않을 거면서 편지지를 꺼냈네. 이번 비는 소나기인가 봐. 하늘이 참 파래. 나 너무 두서없다, 그지? 봐봐, 편지 쓰는 것도 습관이라니까?
아무튼! 1시간 후에 봐―.
-2012년 10월 3일, E-
E.
꽤 오랜만에 그 카페에 왔어요.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카페모카와 티라미수를 먹었어요. …원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충분히 후회하고 있어요, 나.
밖에는 때마침 비가 오네요. 꼭 당신이 내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내렸으면―싶기도 하고, 또 그래서 비가 그쳤으면 좋겠어요. 겨우 당신에게 무뎌졌는데…다시 약해질 것 같아요, 나.
아직도 가끔 당신이 생각나요. 아니, 아주 많이. 날 보며 항상 웃던 모습, 같이 봤던 공포 영화, 같이 맞았던 벚꽃 눈, 추운 겨울날 당신과 먹었던 길거리 음식들……. 너무 생생해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곳곳마다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이 담겨 있기도 하니까.
언젠가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도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해보니 나,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이 별로 없더라구요.
당신 꼭 거기 있어요. 나, 절대 잊지 않고 당신 찾아갈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거기에서 나 잊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2013년 4월 6일,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