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성인이 되고서 놀랐던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인들이 서로 간에는 나이가 어려도 높임말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의 세계는 완전히 달랐는데, 그들은 상대가 같은 어린이라면 비록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 누나이더라도 반말로 상대한다. 적어도 꼬박꼬박 '형', '누나'라 호칭만 붙인다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낯선 형/누나들에게 편히 말하는 1학년생이라도 처음 보는 성인을 마주할 때에는 거의가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유독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는 명확한 위계가 존재하는데, 이 때문인 건지 반대로 어른이 처음 보는 어린이에게 반말로 말하는 것도 그리 어색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일방적인 존대와 하대의 관계는 최소 그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는 계속된다.
어린이가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낯선 어른은 아마 교사일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교사와 맺는 관계는 그들이 앞으로 어른과 형성할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현재 많은 교사들은 적어도 수업에서 '경어'를 사용하며, 수업이 아닐 때에도 어느 정도의 존댓말은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여전히 어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반(?)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필자가 ‘교사는 어린이에게 높임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맹목적으로 주장하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높임 표현의 사용 여부가 어떤 교사의 아동 존중 정도와는 관련 없다고 믿는다. 높임 표현은 어떤 관계에 종속된 수단일 뿐,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의도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던가? ‘언어는 마음의 창’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가치가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인만큼, 그것이 적절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고민해야 할 부분은 '높임 표현'을 사용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이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높임말은 '나'보다 상위의 존재에 대한 복종의 표현이었다. 상호 존중의 의미로서 서로를 높이는 표현도 존재했지만, 일방적인 높임말이나 일방적인 하대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과거 높임말이 상하 수직관계의 서열을 표현하는 도구였음은 명백하다. 계급이 분명하게 나뉜 과거 사회에서 윗사람에 대한 높임말은 도덕적 규범이었고, 반대로 아랫사람에 대한 하대 역시 그저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과거와 현대가 갖는 사회 문화적 배경이 다른 것처럼 그러한 규범이 현재에도 여전히 적용되는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그것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면 이는 아동이라는 예외적 대상뿐 아니라 모든 성인 간의 관계에도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의 성인 간의 존대 문화는 과거와 상당 부분 달리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가 갖는 도덕적 관념이 과거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인과 아동의 관계 역시 과거와는 다른 관념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대 우리 사회가 갖는 도덕적 관념 중 가장 과거와 차별화된 관념은 바로 '인권'이라 불리는 보편적 권리의 존재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갖는다'라고 하는 인권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규범적 논의 상황에서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는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으로, 프랑스혁명 시기의 자연법 사상에서 그 연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권의 존재는 당연하지 않았으며, 권리는 위계적 질서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모두에게 귀속된다고 하는 보편성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인권의 역사는 매우 짧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변화는 매우 컸다. 현대 사회는 인권을 근거로 과거 사회가 지녔던 ‘계급’, ‘차별’ 등의 많은 불평등한 모습들을 제거하고, 상호 간의 존중을 당위적으로나마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두에 언급한 성인 간의 높임말 문화 역시 이러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제 현대사회는 신분이나 계층 등 위계 상의 이유로 합의되지 않은 일방적 하대를 더 이상 바람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며, 존댓말은 이제 위계에 대한 복종보다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존댓말이 상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나이의 상대적 높고 낮음, 그리고 성년/미성년 여부는 그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어떤 위계나 권력에 의해 다르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존중의 표현 방식에 대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백하게 좋고 나쁨이 드러나는 형태라면 그것은 차이를 가장한 차별일 뿐이다. (분명 일반적 상황에서 존댓말은 반말 보다 좋은 표현이다) 그럼에도 유독 어린이에 대한 하대만은 아무런 이유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관습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도덕 및 윤리의 규범이 온전히 합리성의 결과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결과가 아닌, 역사적 맥락 혹은 관행에 의해 존재하는 '관습'적 규범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도덕'이 실제적 현상에 대한 기술이 아닌 규정적 요구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더 적절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근거를 통해 어린이에 대한 반말이 무례한 행위라 주장하고자 한다.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에 연재 중인 필자의 글을 브런치에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참고
"교사는 반말이 당연한 직업인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2593&SRS_CD=0000013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