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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만산 Aug 24. 2022

침묵하는 교사의 반성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지난 상반기, 필자는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급식을 먹을 수 없었던 까닭에 매일 도시락을 챙겨 따로 식사하던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조잘조잘 그 이유를 묻곤 했지만, 필자는 그런 아이들에게 신념을 밝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사의 가치 지향을 교실에서 드러내는 것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교사의 채식이 마치 정치적 입장 표현처럼 보일까 걱정했고, 또 어떤 이들은 채식이란 별난(?) 식습관이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에 대한 불만 민원을 미리 걱정해주기도 했다. 이들의 걱정들은 필자가 인터넷에서 목격한 채식에 대한 수많은 혐오의 표현들과 함께 겹쳐져 충분히 일리 있어 보였다. 선생님의 걱정스런 마음도 모르는 교실 속 아이들은 오히려 선생님이 다이어트를 한다는 장난스런 소문만 퍼트리곤 했다.

우리 교사들은 다른 어떤 직업군들보다도 가치 지향에 대한 침묵을 크게 요구 받는다. 이는 단순히 공무원이 갖는 '정치적 중립의 의무'의 범위를 능가한다. 지금도 학교 밖 공간에서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이나 ‘페미니즘’의 문제에서 그러하며, 사소하게는 ‘비혼주의’나 ‘이혼’과 같은 일상적 지향이나 경험까지도 숨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이러한 키워드를 검색만 해봐도 자신의 가치 지향을 교육에 적용했다가 집중 포화를 맞고 현장을 떠난 교사들의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우리 사회의 특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시대를 관통하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않고 ‘혐오’를 꼽을 것이다. ‘꼴X미, 한X, 틀X, 똥X충’ 등 수많은 혐오 단어들의 탄생이 말해주듯 혐오는 성별·세대·국가·성적 지향·빈부 등 모든 구분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기사 댓글, 커뮤니티, SNS, 그리고 심지어는 정치의 영역에서까지 혐오의 표현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중이다. 이들은 이제 단순 소수약자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닌 나와 다른 모든 존재들을 향하고 있다. 바야흐로 혐오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겠다. 이 상황에서 학교라는 공식적 교육기관에서 가치를 전달하는 교사의 가치 지향은 어떤 가치에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학교가 자신의 입장을 교육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논쟁의 휴전선으로서 차라리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할 것을 강조할 것이다.


  따라서 논쟁적 이슈를 교육할 때 교사는 어느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에 실패한다면 어느 쪽에서든 강한 비판이 들어올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교사들은 오히려 매우 보편적인 가치의 제시자로서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엄선된 가치와 규범만을 제시하는 데 자신의 역할을 한계 짓고 있다. 즉 논쟁적인 가치에 대한 교육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특정 가치에 기울게 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으며, 각종 민원이나 불만들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교사의 중립적(?) 행태 가운데 교실은 안정되고 단단한 가치만이 현존하는 공간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교실은 불편하지도, 충돌하지도 않는 공간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교사는 사회가 가진 가장 일반적 가치를 학생에게 전달하는 역할에 스스로를 전락시킴으로써 학생들이 특정 가치에 편중되는 것, 또는 특정 가치를 혐오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가치중립을 위해 교사의 역할을 사회 일반적 가치를 전달하는 것으로 한정 짓는 것은 정말 충분할까'라는 의문을 필자는 지울 수 없다.




  피아제를 비롯한 교육학자들은 아동에게 모순적인 지식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인지적 불균형'의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아동을 더 성장시킬 수 있다는 교육 원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이전의 ‘지식의 수용자’로서의 학생관에서 벗어나 아동들이 직접 지식을 구성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학생관이 도입된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갈 시민은 더 이상 사회의 지배적 덕목을 따르는 것이 아닌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민관이 대두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으로 교육할 주체인 교사가 마음 놓고 제시할 수 있는 모순적 지식들은 수학적·과학적 개념들에 한정될 뿐이다. 학생들의 도덕적·인격적 성장을 이끌 수 있는 가치 개념의 교육에서 그 내용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엄선되고 어떤 논란도 없는 가치들(사랑, 우정, 성실, 배려 등) 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또는 가치 자체에만 집중하여 교육이 추상적이고 단편적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은 단지 사회의 지배적 가치만을 흡수할 뿐,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성찰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능력적 성장도 그들에게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가치에 대한 성찰 없는 추종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저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수십만의 죽음에 기여한 현실 속 악마의 모습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에 참석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웃 할아버지였다. 뿐만 아니라 재판의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오히려 공무원으로서 가져야할 직업윤리를 근거로 '당시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비도덕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여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했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거대한 악은 어떤 끔찍한 모습으로 시작되기보다, 평범함 속에서 발생하는 성찰 없는 추종을 통해 시작됨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


 


  아이히만의 항변은 '가치중립성이 갖는 모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분명 사회 대다수가 인정하는 공직 윤리에 따라 사회공동체를 위해 일한 행위의 결과가 반인륜적인 범죄에의 동조였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중립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도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사회 일반이 인정하는 가치를 의문 없이 충실히 받아들여 왔다. 아이히만이 그랬고, 나치 독일, 일제강점기 그리고 군사 독재 시기의 많은 교사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정 시대의 특정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 보는 것은 모순적이다. 분명 현 시대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논쟁적 가치들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교육과정만 열심히 가르친다면 우리는 정말 그 모든 논란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단순 희망사항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중립을 위해 논쟁적인 가치의 교육을 포기할 때, 우리는 지금의 사회가 갖는 주류적인 경향성에 따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집권 정당의 색깔에 따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교육에서 걷어낸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주류 집단이 갖는 편견에 편승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맹목적으로 가치중립적인 교사란 현 시대의 편견과 혐오들 역시 함께 재생산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대답해보자.


 


나는 정말 이 혐오의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부끄럽게도 필자는 아직 혐오주의자다.






ps.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보자면 분명 교사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치 교육을 포기해야 함은 분명 아닐 것이다. 

 현실 속 필자는 분명 급진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며, 가치중립적 교육에 대해서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대해 긍정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에 연재 중인 필자의 글을 브런치에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참고하면 좋을 자료>


- 윤근혁, 양성윤. "획일화 세뇌 교육이야말로 가장 강한 폭력," 우리교육 ,  (2016): 106-117.


- 미디어오늘,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 초중고교에서 실시 당연", 2021.5.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10&oid=006&aid=0000107782


- YTN, "'페미예요?' 여성교사 10명 중 4명, 페미니즘 혐오 피해", 2021.9.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1638349


- '보이텔스바흐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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