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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만산 Aug 24. 2022

승진을 포기한 자들을 위한 변

학교 속 '별종'들



1. 어느 날 갑자기 승진하기 싫어졌다.


 1급 정교사 자격 취득을 앞둔 필자에게는 연수에 대한 특별한 선택지가 하나 있다. 바로 석사학위를 사용해 1급 정교사 연수(이하 ‘1정 연수’) 없이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찬스를 사용할 생각도 않는데, 이는 여기에 큰 단점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훗날 승진을 위한 연구점수 획득에 학위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작 한 달짜리 연수를 대체하는 대가로는 뼈아픈 듯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필자는 1정 연수를 받기 싫어졌다.



 그냥 왠지 승진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누구든 교직에 들어서면 한 번쯤은 승진을 고민한다. 은퇴를 앞둔 동료 교사의 하소연, 현장에서의 실망감 등 많은 이유들로 고민은 깊어진다. 필자가 1정 연수와 관련하여 생각하는 지점 역시 승진에 대한 고민인 듯하다. 필자의 결심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들 만류했다. 그중 가장 와닿는 조언은 '승진을 딱히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 승진 요건이 다 채워지고, 그때의 마음이 지금과 같지 않으면 어떡하냐'라는 것이었다. 다시 상상하니 또 가슴이 철렁거린다.


음.. 그래도 딱히 마음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이런 멍청한 똥고집


 



2. 교직은 왜 공허한가?


 10대의 필자는 그때의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별 고민 없이 교육대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이 선택의 결과를 직면하고서 꽤나 당황했다. 건방진 소리지만 리코더와 피아노가 함께 할 내 삶이 그리 멋져 보이지 않았다. 교대에 진학한 내 삶은 마치 결말을 알고서 읽는 소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당혹감을 해소하기 위한 필자의 선택은 비겁하게도 끊임없는 합리화였다. 타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스펙을 위해 고생하는 걸 보고서 내 여유에 만족했고, 그들의 값비싼 등록금과 내 등록금을 비교하며 티끌만 한 만족감을 찾기도 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부여잡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번복할 용기는 없었다. 전역 후에는 익숙해진 건지 합리화에 성공한 건지 결국 졸업하고, 합격하고, 발령 났다. 그러나 여전히 치열하게 무언가를 쟁취하고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진다. 그들의 삶은 어떤 빛나는 가치들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내 삶은 소박해 보였다.


  모순적이게도 필자가 '교육' 그리고 ‘교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이 길고 가는 후회와 합리화가 휩쓸고 간 뒤, 오기만 남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교직은 왜 공허할까'라는 고민을 했다. 만족감이라는 기준에서 교직을 타 직군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가시적인 성과의 유무일 것이다. 이 성과 중 하나인 금전적 이득에서도 교직은 큰 이점이 없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불만족하는 이유가 금전적 이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타 직장인들은 그들의 직장에서 노력한 만큼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한다. 그것이 앞서 말한 금전적 이득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보다 값진 것은 ‘인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더 노력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 이로부터 '주변의 선망 어린 시선'이나 '더 높은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형태의 인정을 얻는다. 아무래도 교직의 가장 큰 단점은 현재보다 더 높은 '인정' 따위를 획득하기 어렵다는 특성인 듯하다. 이 때문인지 어떤 교사들은 발령 초기에 잊은 열정을 영원히 되찾지 못하기도 한다.


 



 3. 학교 속 '별종'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교사들은 열정적이다. 교사들은 대부분 바쁘지만 열정적인 것은 또 다른 것이다. 별다른 성과도 얻기 힘든 이곳에서 저렇게 바쁘게 일하는 이들의 존재는 너무나 모순적이다. 마치 집단농장에서 죽도록 일하는 노동자와 같달까? 이런 그들이 노력하는 주제는 참으로 사소하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즐겁게 학교에 올까'


 이러한 목표를 위해 아무리 애써봤자 나와 우리 교실만 조금 더 행복해질 뿐, 우리가 인정을 갈구하는 주변 성인 집단으로부터는 크게 인정받기 어렵다. 차라리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원 선생님의 목표가 그들에게 더 와닿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정을 잃지 않는 '별종'들은 대가 없는 노력을 직장을 넘어 그들의 삶 속에서까지 이어나간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맑스(Karl Marx)는 현대 사회의 직업(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양상을 비판했다. 때문에 그는 먼 훗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으로 완전한 풍요가 갖추어진 사회에서 인간은 지금과 같이 (물질을 얻기 위한)수단으로서 노동을 하지 않고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만을 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노동은 자아실현을 위한 취미와 같지 않을까?


 어쩌면 '별종'들에게 교직은 공허한 필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본질적인 의의를 지닌 무언가 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때부터 (외부로부터 도구적 성과를 획득하기 힘들다는) 교직의 단점은 역설적이게도 교직 안에 외부와는 독립적인, 그것만의 가치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학교 속 수많은 '별종'들의 존재 사실이 이를 뒷받침할 것이다. 단지 수단으로 존재하는 많은 직업들과 다르게, 교직은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이 외부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 만큼 우리 삶과도 관련된다면, 진정으로 훌륭한 교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진정 훌륭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발견한 자그마한 의미가 필자의 오기에 더해져 고집을 낳은 듯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교사’로서 결판을 내야겠다는 고집 말이다. 만일 필자가 '교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승진이라는 우회적 방식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을 마주하지도 번복하지도 못하던 대학생의 '나'를 다시 마주할지 모르기에...


 



 *필자는 승진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훗날 필자가 도피를 위해 승진에 얽매이게 될까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에 연재하고 있는 필자의 글을 브런치에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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